유배는 어떻게 자유와 만나는가

Posted by on 11월 22, 2018 in 휴림산방,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버려진 자전거는 어떻게 그 자유를 얻었을까”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은 1974년에 출간된 책이다. 네루다가 1973년 9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70 노인의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온갖 물음을 300개 넘게 던졌다. 버려진 자전거에서 비로소 자전거의 자유를 발견하였다는 구절에서 나 또한 안도한다. 내 유배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게 뭔가. 어디에 소용되는 건가. 내게 필요했던 것이었던가. 부자유스러웠던 건 또 어떤 게 있었다는 건가. 충분히 부자유스러움과 맞서서 세상을 살아왔던 게 아닌가. 그래서 많은 것을 버린 것 아닌가. 속하다, 속하다. 속한 것에 스며드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 부적응이라고 했다가 아니야, 부자유스러움은 모두 떨치자 했던 것 아닌가.

지금은 자유가 곧 침묵인 상태에 놓였다. 침묵이라기보다는 칩거일 것이다.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 줄고, 혼자 중얼대다 만다. 힘들다. 체질적으로 분주했던 생활에서 저만치 물러나 있다. 스스로 선택해서 귀한 근거를 만들어 찾아든 유배이다. 힘드니까 친구가 보인다. 먼 친구가 많았구나. 어려울 때 친구가 보인다더니 꼭 그렇다. 가족도, 동료도 마찬가지이다. 고난은 사람을 가려내는 힘을 지녔다. 시린 한 편을 따스하게 덥히려 노래를 듣는다. 새벽부터 스멀대며 벽을 타고 넘어오는 세탁기 돌리는 소리는 이제 좀 참을만하다. 존재의 근거를 어느 정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에서 이해가 되면서 그 소리의 데시벨은 낮아졌다. 꽉 막힌 생각은 불통이다. 유연한 사고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세탁기 소리에 맞서는 음악을 유튜브에서 틀었다. Leonard Cohen이다. 그의 동굴 속 깊은 심연의 고독이 이 아침에 잘 어울린다. 어디 세탁기 소리가 범접이나 하겠는가. 저 주문처럼 번지는 아득함이 좋다.

나 또한 볼륨이 클 줄 몰라 15% 크기로 낮춘다. 혼자 듣기에 딱 좋은 크기이다. 그냥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곳의 생활은 잿빛 짙은 가라앉음이다. 겸손한 것일까. 겸손한 척하려는 것일까. 하기사 분노가 좋을 리는 없다. 문제는 내 자존에 관한 진행일 것이다. 좀 더 두고 보자는 심보일 것이다. 당당하다는 것은 되도록 비굴하고 조잡한 일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시선을 멀리 두는 것이다. 원대함까지는 아니지만 가슴에 서늘한 뜻을 의미 있게 세운다. 자꾸 되뇐다. 그래서 그 끝은 어디인가를 묻는다. 여주와 수원의 제자를 묶어서 밴드를 만들었다. 내 의도는 모두들 친구이고, 내가 엮어서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옛 제자를 위하여 명예의 전당 밴드를 추가하였다. 내가 현역에서 못한, 마지막 현역 직무를 수행한 것이다. 과연 이들은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두고 볼 참이다. 잘되기를 바라고, 잘 되었을 때 기쁘고, 도울 수 있을 때 즐겁게 다가서는 그런 존재로서 서로에게 친구가 되라는 덕담이다. 기분 좋은 날, 가령 1년에 1번 정도 만나 곡주라도 나누면서 격의 없이, 나를 포함한 모두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는 자리를 펼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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