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사리암 가는 길에서 묻는다- 사리암

Posted by on 1월 6, 2019 in 아름다운산책::온숲 | 0 comments

021. 사리암 가는 길에서 묻는다.-호거산운문사 사리암 / 온형근

세상에 드러나 있는 것들의 존재감

사리암을 찾았다. 20주년에 이른 조경문화답사동인 ‘다랑쉬’의 회장단 신년교례회를 울산에서 열었다. 20년을 회고하자 했으나, 묻어 버리자고 했다. 다가오는 미래의 20년을 내다보자는 제안이다.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대화가 좋다. 자연스러운 이야기에서 禪語를 잡아챈다.  그렇게 20년의 시간은 서로 비기고 있었다.  다음날 청도에 있는 사리암을 찾기로 한 것은 예정과 상관없이 저절로 이끌리는 귀한 인연이었다. 운문사 가는 가지산을 넘으면서 탄복한다. 세상에 드러나 있는 것들의 존재 가치를 짐작하고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대한민국 곳곳이 비경이다. 자꾸 들락대며 힘들게 일한 경제를 굳이 외국 풍경에 쏟아부을 일이 있을까. 짧은 여정에 센 자극이 필요한 단초이다. 걷듯이 여유로운 곳곳의 이 비경을 다 어쩌면 좋을까, 내려서 걸어도 시원찮은 판에 울산에서 가지산을 거쳐 운문사를 향하는 그 길 자체가 아름다워 산 넘기가 왜 넘어야 하지 하는, 의미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사전 지식 없이 어딘가를 나선다

평지 가람인 운문사가 웅장하다. 청도를 다녀 본 적이 없었기도 하겠지만, 운문사의 규모에 놀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녔을까. 그들을 위무하고 꿈을 심어 주는 사찰의 기왓장, 기둥 하나는 또 어떤 슬픔과 기쁨을 숨겨놓았을까. 자동차로 일단 주마간산처럼 지나는데, 자꾸 고개를 돌려 멀리서 전경을 일별 한다. 사리암 주차장에서 계곡을 본다. 물도 맑고 대단한 위세를 감지한다. 산 첩첩 물 곡곡이다. 중첩되어 서로를 빗기면서 빗장처럼 열고 닫고의 연속으로 깊어지는 산이다. 그 호젓하고 깊은 내밀한 중력의 이끌림으로 흐르는 하천은 계곡이 되어 청명한 하늘만큼 청정하다. 이미 저 산 꼭대기쯤에 법석을 차렸을 사리암의 위의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표지석 앞에서 합장 3배를 한다. 늘 그렇듯이 사전 지식 없이 어딘가를 나서고 다녀오는 것은 즐겁다. 현지에서 다가오는 임장감이 그지없이 좋기 때문이다. 세상에, 세상에….邪離庵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문장 기술 방법이다. 부처님의 사리 정도로 생각했다가 큰 반전에 이른다. 간사하고 사악한 것들과의 이별이라니, 그들을 떠나보낸다는 것이니 깜짝 놀란다. 

사리암 오르는 길의 선명한 시선

사리암을 오르는 길에 각목 지팡이 소리가 산을 크게 울린다. 꽤 많은 중생들이 오르고 내린다. 이 곳을 매일 다닌다는 분이 존경스럽고 경외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반반씩 나누어서 조상도 모셔야 한다고 했더랬는데, 급격히 조금씩 다른 생각이 자리 잡는다. 그대로 그냥 일상이어도 한없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전환된다. 매일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늦게 논문 쓰고 공부한답시고 부족한 운동량을 탓한다. 그래도 언덕을 오르는 일은 늘 거뜬하고 시원하다. 내리막이 외려 불편하다. 함께 사리암 가는 길에 동승한 다랑쉬 동인들의 표정도 거뜬하고 밝다. 까마귀 소리가 나서 둘러보니 하늘이 새파랗다. 산마루를 배경으로 선명하여 침침한 시력이 되살아나 멀리까지 맑게 잘 보인다. 

보내야 할지 담고 있어야 할지

사리굴 아래 가방을 두고 천태각을 오른다.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나반존자를 모신 각이다. 함께 동행한 다랑쉬 신입 회원은 사리굴에서 108배를 시작한 듯 몰입이다. ‘나만은 변함없이 가난하게 살게 해 달라’라고 소원을 빌었다. 산마루 근처 사리암의 이런저런 구조물 모두가 놀랍다. 사람이 마음을 먹고 움직이고 그리하여 그리 되도록 애쓰는 일이 늘 놀라움이었듯이, 이런 것을 대상이 어디든 모두 공력이라고 부른다. 그 공력을 모으고 사용하고 하는 반복이 계속된다. 공력에도 사악함이 스민 공력이 있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사이 나의 공력이 사악함으로 물들어 있는지를 자주 펼쳐보아야 한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마음의 거울에 비춰보아야 한다. 자신만이 자기의 내면을 볼 수 있다. 그것도 보려는 노력이 있을 때야 가능하다. 그래야 내 안의 사악함과 이별할 수 있다. 분명 사리암은, 세상의 사악함과 나를 별리시키게 하여 달라는 기도보다는, 내 안의 사악함과 헤어지는 준비를 하라는 가르침이다. 떠나보내야 할지 담고 있어야 할지를 내가 정하라는 말, 그게 사리암의 준엄함이다.

천태각 계단을 내려오며 묻는다

천태각 나반존자를 친견하고, 가난함을 즐길 마음을 공유하고 내려오는데, 마지막 계단에서 정수리로 툭 떨어지는 게 있다. 고드름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영험하다는 사리굴을 이루는 거대한 암벽이다. 작은 골 사이가 젖어 있다. 그곳에 미량의 수분이  흐르며 얼어 모였다가 떨어지는 경우이다. 가끔 작은 돌멩이가 떨어진다고 한다. 고드름에 맞닿은 경우는 금시초문인가 보다. 기도에 대한 응답 이리라. 잘되라는 기도에는 돌멩이로 응답하지만, 여기서 더 낮춰달라는 기도에는 고드름으로 응답하나 보다. 혼자 그렇게 여겼다. 산신각으로 향한 발걸음은 이곳이 혈처임을 스르륵 느끼도록 몸이 반응한다. 묘한 떨림을 경험한다. 그 사이, 오고 가는 많은 이들이 새롭다. 한 가족 3대가 오르기도 하고, 젊은 처자들이 왁자하게 다니기도 한다. 자동차로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좋은 곳도, 30분 넘게 다리 후들거리며 오르는 곳도 서로에 대한 가감을 매길 수 없다. 가만있는 사람 툭 쳐서 건드려놓는 일군의 바람잡이들을 조심할 일이다. 멀쩡한 생사람 곪는다. 이 또한 모든 것이 내게서 비롯되었음을 다시 더 각인한다. 누군가의 사악함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남의 사악함을 보기 전에 내 안의 사악함을 먼저 본다. 그리하여 더 커지기 전에 크기를 줄이고, 형태를 다듬는다. 그래서 지붕 위의 막걸리를 시청하였나 보다.

(201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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