醉中運筆

Posted by on 4월 24, 2019 in 與言齋::묵상 | 0 comments

“내가 식후에 용무를 보잖아”
“응, 근데……”

어제도 편하다 했다. 하긴 나는 워낙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러웠으니까. 오히려 힘들게 사는 이들의 고통을 알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식전이냐, 식후냐는 줄곧 일정한 운동 규칙을 지녔던 듯하다. 그게 뒤집혔다. 양촌우렁이쌀막걸리드라이로 달라졌다. 아무튼 양촌 양조장에서 탁주로는 최고급인 브랜드이다. 이게 뭐라고, 말할 나위 없이 날아갈 듯 편하다. 허리와 관절은 오늘 침 맞으러 가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제끼고, 각설한다.
해장술? 오우 아니다.
그냥 멋술이다.
내 뇌에서 졸고 있을 때 저 아래 형이하학 학파의 腸이라는 놈이 불러낸 것이다. 장도 해장술을 즐긴다.
해서 지금 나는 음주운필 중이다.
입맛을 돋운다는 반주를 벗삼고 있다.

양주동은 ‘문주반생기’에서 공간에 대한 시간의 축시법을 술로 해결하였다고 했다. 축시법의 蘊奧한 이치를 깨우치는데에는 술만한 게 없다고 했다.
술만 먹으면 구두를 잃어버리던 논개의 수주 변영로는 ‘명정 40년’에서 숱한 술과 관련된 자신의 행적을 나열하는데 배를 잡고 웃는다. 그야말로 포복절도이다.

반주에 음주운필 운운할 바는 아닌 듯 하나,
깊고 오묘하기로는 위의 저 술은 항아리에 담아 며칠 익혀야 한다는 귀착점이다.
냉장고에 넣고 차게 마시는 게 아니라 실온의 항아리에서 뽀그뽀글 거품이 난투극을 벌이도록 모른 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쐬주만 마시는 내 친구들의 올곧은 간편주의를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쐬주에 대한 일편단심까지도 존경심 발로이다.

나처럼 시시각각 수시로 초단위로 튀는 관점과
숙성의 깊이와 끝을 알 수 없는 탁주의 세계는,
그런 면에서 서로를 이해한다.

그리운 벗들이여.
나의 익선달이여.

그대들의 안부와 세상의 안위를 소급하여 묻소.

-이천십구년 사월 스무나흗날, 月白이 ‘달집’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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