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깃든 멀쩡함

Posted by on 4월 27, 2019 in 與言齋::묵상 | 0 comments

죽은 듯 고요하다가 터진다.

살아 있는 것들은 예외 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단히 흐른다. 아프다가 멀쩡해지고, 멀쩡하다가 아프다. 순환이 있다는 것은 때가 있다는 말이다. 아플 때와 멀쩡할 때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들락대는 거다. 영원히 젊고 멀쩡한 육신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원히 아픈 것도 없다. 그래서 생명이다. 유한의 흐름에 놓여 있을 뿐이다.

멀쩡함과 고통스러움의 사이를 들락대는 중간 지대에 살고 있다. 웃고 떠들며 오욕칠정에 놓여 있는 순간이다. 어느 날은 손님이었다가 어떤 날은 주인이다. 내 안의 흐름이 정체되어 멈췄을 때, 고여서 아프기 시작한다. 그러다 또 때가 되면 막힌 것이 허물어져 순순하게 흐른다. 아픔 또한 가신다. 조금만 기운 생동하면 마구 걷고 싶어 한다. 걸으면서 식물성 녹색에 감탄하고 고마워하는 거다. 때라는 것은 그렇게 주고받는다. 이러한 순환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나눌 줄 알면 철든 사람이다. 때를 아는 것은 곧 절기를 아는 것이고, 두루 철을 아는 것이니, 철 든 사람은 아플 때와 멀쩡할 때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며칠 걷기 힘든 것을 보니 아플 때가 왔나 보다. 그래도 때와 다르게 활동해야 할 행사가 있기에 한의원과 병원을 찾았으나, 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들일로 여기저기 아파서 견딜 수 없는 참 많은 이들이 진을 치듯 기다리고 있다. 이곳 부여는 어느 병원이나 한의원 모두 이른 시간부터 제 몸에 찾아온 세월의 손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으로 북적인다. 들일은 때가 있어 놓치면 일 년 농사를 망치기에 몸이 아프리라는 그 순간을 놓치고 만다. 때라는 엄중한 우주의 흐름이 몸의 노화를 망각시키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 급한 들일이 한풀 꺾이면 제 몸 안에 들어오신 아픈 손님 모시고 의지할 곳에 모여든다.

병원은 백화점 못지 않게, 연실 ‘고객님, 고객님’ 하면서 상냥하다. 집에 아들, 딸, 곁지기 누가 내 아픈 것 상냥하게 대할까. 내 일상까지 들여다 보면서 이웃처럼 이야기를 풀어내는 말벗이다. 말벗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가고 싶은 곳의 일순위에 놓인다. ‘환자’는 이 시대의 성인이다. 유가 집안의 공자와 맹자, 묵가 집안의 묵자, 도가 집안의 장자와 노자, 법가 집안의 한비자와 관자, 명가 집안의 공손룡자, 병가 집안의 손자와 오자를 넘어서거나 어깨를 나란히 한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자’만큼 더 큰 대접을 받는 성공한 위상은 없을 것이다. 이 시대의 아이콘이다. 아이돌보다 한끗 위가 ‘환자+분’이다. 그러니 자식들 ‘의과대학’ 보내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그 자식들이 나중에 시달릴 감정노동의 짐은 또 어쩌라고. 천직이라고 각인시키면 될까.

노구가 되면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 멀쩡함 속에 망가짐이 예속되어 있다. 그냥 아무렇지 않아 보일 뿐이다. 아픔 속에 적응되어 있거나 조금 나아짐의 새 기운이 자라고 있는 것 뿐이다. 일찍이 이런 운동 법칙에 쉽게 다가선 사람은 무감하여 무념무상의 삶을 자연스럽게 이룬다. 일부러 어찌 되려고 하지 않는 부류이다. 선천적인 기질을 갖추었다. 그러니 병의원에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횟수를 줄이고 아픔을 받아들이는 의연함의 내공을 늘려야겠다. 테이프라도 찾아서 테이핑이라도 하면서 끄적대며 걸어야겠다.

-이천십구년 사월 스무이렛날, 月白이 ‘달집’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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