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근대적 아빠

Posted by on 11월 1, 2019 in 시집/신작시 | 0 comments

떠나고 내보내야 할 일로 즐비하다.

저 높은 곳을 향하려는 촌스러움을 경계하랬더니,

어느새 물 가득 찬 항아리가 되어 넘치고 있었다.

살아봐야 알게 되는 일이 있고,

살아보지 않아도 뻔히 알게 되는 일이 있다는데,

나는 여태 손바닥처럼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일도

무릅쓰고 살아보고서야 되돌아보는 일 투성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신의 고결함에 맞닿아 있다는 등

세상의 모든 천박함은 고귀한 제 신분을 자본과 맞바꾸거나, 권력과 함께하고 싶어질 때 곤두박질친다고, 책방 가득 번뜩이며 신간 코너에 누워 있는 처세술과 성공학 책은 인제 그만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젊은 기백이 급속하게 노화되는 것은 자본의 단맛이라고, 일하지 않는 사회에서 나까마와 브로커만 양산되고 있어 어느 순간 만나는 참 많은 사람이 거간꾼이 되어 있다고

중간에 거간이 없으면

너와 나는 서로 믿을 수가 없고

순결은 상처로 베이니

품위는 한순간 남의 혀와 몸가짐에 맡겨진다고

내 안에 어수룩함이 어느덧 고여 있더니

세속의 식견 쌓여 있었던 게다.

결혼하겠다고 만나보라는 딸내미 인연을 눈앞의 이익만 챙기는 촌스러움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아뿔싸, 내가 근대적 아빠였구나. 내게도 천민자본주의적 속물근성이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었구나. 하룻밤 묵상으로 몽매를 버렸다. 딸에게 카톡을 보냈다.

“장하고 대단하다, 아빠보다 훌륭하다.”

-이천십구년 시월 스무이튿날, 여언재에서 ‘月白’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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