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境과 담장

감성과 직관으로서의 글쓰기, 산문과 논문 사이의 명상, 떠오르는 글쓰기 초벌

날마다 바래가는 걸

Posted by on 11월 12, 2018 in 意境과 담장, 경관/평론 | 0 comments

주차장에서 선뜻 눈에 들어 온 장면이다. 뭐라 하지 않아도 저렇게 저물고 낡아 가는 것을, 벽면을 향해 자라고 있는 자작나무 풍경이다. 묘하게 눈길이 자주 간다. 식상하지 않는다. 어떤 의도였는지 식재 설계를 되돌릴 필요 없다. 벽쪽이 좁고 양 식재 간격은 아슬하다. 딱 지금 간격에서 모양 나온다. 더 크면, 더 클 것 같지도 않은 환경이지만, 좁고 모난 풍경이 나올 게 분명하다. 지금의 저 모습 그대로만 간직하여도 여전히 아름다운 식재 풍경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축에서 자작나무만 비껴갈 수 없다. 아름답고 이쁠 때, 자꾸 봐야지. 그게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다. 하지만 더 많은 세월이 지나도 저 공간에서 자작나무는 환경에 맞춰 최적의 선택을 할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기를 기대한다. 심기는 사람이 하였지만 10년, 20년 지난 후의 모습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다. 다시 손을 대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보기 싫다가 다시 보기 좋아지는 것은 묵히고 익히며 발효시키는 우리의 미의식과 닮아 있다. 자연도 스스로 제어하는 기능을 알게 모르게 발휘한다. 보기 싫었는데, 다시 보니 보기 좋은 모습이 자연의 힘인 것이다.

Read More

담장과 의경

Posted by on 9월 30, 2018 in 意境과 담장 | 0 comments

담장은 담 너머의 외부에서 바라보는 회화이다

담장 디자인이 뒷걸음질이다. 공주, 부여, 익산을 백제의 고도라고 부른다. 경주도 마찬가지이다., 古都라는 말이 상징하는 게 뭘까? 오래된 도시로서의 고즈넉함 같은 게 아닐까. 이곳에서 생활하는 일상의 꽤 많은 부분이 너그럽고 느리며 지혜로운 곳 같다 생각 들지 않는가. 이런 고도에서 관청이 발주한 담장 디자인에 고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도심 담장이 등장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런 사태의 전말과 결과를 추론하고 예측하는 것은쓸데 없는 일일까. 전통 담장 디자인에 대한 논문을 살펴보니, 꽤 많다. 그러나 담장 없는 사업에 대한 논문이 담장 관련 논문의 숫자만큼 엇비슷하다. 담장 허물기에 대한 논문이 담장 디자인 논문을 상회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담장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왜 뒷걸음질을 치고 있을까. 대체 담장 허물기 사업은 무엇이길래, 좋은 담장을 만드는 전문가보다 담장 없이 사는 일에 한꺼번에 올인한 이런 것을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담장은 시대를 이끄는 오래된 전통이다

인류는 정착 생활을 통하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담장을 울타리로 만든다. 境界를 만든다는 것은 구별의 행위이다. 안과 밖, 너와 나, 차안과 피안, 살면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이분법적인 가치 판단이 선행된다. 그 안에 더 많은 경우의 수가 상존하는 것은 물론이다. 경계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안락을 택하는 것이 담장의 역할이다. 큰 짐승과 외부의 예기치 않은 피폭을 일차적으로 지연 또는 완화시켜주는 것이 물리적인 담장의 기본 역할이다. 집의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잡아주고, 나쁜 기운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옛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지혜이다. 방어라는 수세적인 태도에서 만들어 내는 담장이지만 미감의 여유로운 운치를 만난다. 생활의 모든 도구에서 이런 미감이 빛나는 게 문화 유산이다. 담장에도 사람의 오래된 사유가 빚어져 있다. 개성 넘치고 다양한 문양과 재료미를 한꺼번에 잃었다.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담장을 바라보는 사유를 새롭게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운동이 되게끔 이끌어야 한다. 지금 시도되고 있는 담장의 고착화를 관심으로 파악할 때이다. 공간 바닥의 포장 디자인보다 담장의 디자인이 낙후되었다. 대체 담장은 왜 세우는가.

부여문화재사업소의 전통미 물씬한 사고석 담장
Read More

意境이라는 키워드로 동아시아 미학을 퉁친다고?

Posted by on 9월 29, 2018 in 意境과 담장 | 0 comments

지금, 여기서의 풍류

의경이라는 말을 받아 들이기에 꽤나 복잡한 과정이다. 의경이라는 말 이전에 의상意象을 알아야 하고,  象이전에 形을 끄집어 내야 한다. 형-상-의상-의경의 과정으로 짧게 줄인다. 시대별로 변화하는 개념이고 발전하여 두루 통섭하게 된 게 의경이다. 나는 이 의경이라는 말을 지금, 여기서의 풍류라고 받아 들인다. 풍류는 ‘창의적 유희’이다. 풍류에는 반드시 공간이 필요하다. 의경을 spacial imagery라고 일컫는다. 의경이라는 말은 뜻 意와 경계/지경 境으로 이루어져 어떤 경계를 전제하는 것이고 그 경계는 곧 공간이며, 공간에 놓여진 모든 객체의 대상인 사물 또는 물체를, 오브제를 형에서 상으로 이끈다. 그래서 상은 상외象外에서 상을 이룬다. 그러니 意象이 되는 것이다.

풍류는 곧 자연과의 교감이고 수양이다

의경을 空間意象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제한되고 한정된 공간에서의 보이는 상에 대한 마음의 향방이다. 그래서 의경은 자연과의 교감을 이루는 어떤 현상임에 분명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워담을 수 있는 만큼의 역량으로 펼쳐진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거치면서 중국과 달리 대자연과 함께 하면서 운기조식하고 호연지기를 함양하던 선조들의 수양이 곧 풍류였다. 생각해보자. 대자연을 오르고 내리면서 심신을 수양한다는 것이, 근육만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대체 근육을 위하여 깊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유산이다. 참고할 전거가 없다고 계속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학자들이 오히려 안타깝다. 직관과 감성에 의한 논리의 전개를 지극히 꺼려한다. 금방 말할 수 있는 것을 계속 돌려 말하는 것이 그렇다. 전거가 없으면 말을 아낀다.

이 공간은 대체 무엇에 쓰임인가

공간의 쓰임은 생활이다. 애초에 생활 속에서 공간은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았다.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의 씀씀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니 크기와 형식을 정하는 것은 허튼 짓이다. 지금에 와서 그 유형을 나누고 정리하면서 꽤나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이용하지만, 그때의 마음이 아니다. 사람의 뜻인 意가 익어서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곧 휴식 공간을 말함이다. 여기서의 휴식은 무엇인가. 동양에서는 하나같이 또 하나의 진취를 위해 쉬는 것을 말한다. 완벽한 휴식으로 들어서는 것을 초야에 묻힌다. 또는 전원 생활이라 했다. 초야나 전원도 불러주면 나가겠다는 얄궂은 믿그림은 여전히 상존한다. 끝까지 묻혀 살아야 하는 지점에까지 이르면, 다행스럽게도 더욱 공간이 새로워지고, 그 공간의 대상물 모두가 낯선 사유의 칠판이 된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새 지저귀며 자연의 손님으로서 세상의 숨결을 예우할 때부터 意象은 象外의 象을 만들고 배운다. 그러면서 변화는 意境의 플랫폼으로 바뀌고, 사유의 비롯됨과 마무리가 번갈아 순환한다.

스페인의 케렌시아 Querencia

2018년 10대 트렌드 분석 센터에서 내건 것 중 하나가 케렌시아이다. 투우가 마지막 진기를 끓어 모아 싸울 직전에 혼자 잠시 숨을 고르는, 자기만의 공간을 케렌시아라고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든 필요하다. 최근에 이런 트렌드의 삶이 불길처럼 직종과 삶의 형태를 넘어섰다. 혼자 조용히, 짧은 시간이라도 혼자만의 공간에서 숨고르고 일기당천하려는 기세이다. 조경이란 바로 이런 공간을 만들어 주는 일이 아닐까? 실내 조경도 마찬가지이다. 길거리에 발걸음 몇 옮기면 즐비한 카페 역시 케렌시아의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사적이어서 일기당천 하기 직전의 공간으로 거듭 리모델링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최근 곳곳에서 이런 공간이 조경의 공간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물론 건축적 시도가 먼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쪽 전공 학자들은 어떤 논리이든 뱅뱅 돈다. 그가 말하는 스스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자료 정리를 하여 모아 발표하는 것인데..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다. 계속 몇 바퀴째 뱅뱅 돌고 있다. 학자로서의 내 의견이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상상력의 부재와 다름 아니다. 참고할 전거가 없으면 그냥 전공자로서의 직관에 의한 기술도 필요하다.

비대면 공간에서의 주고받음

또 하나의 트렌드로 마케팅에 적극 활용되고 있는 발전하는 키워드로 언택트가 있다. 언택트untact는 접촉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와 반대의 개념을 지녔다. 케렌시아가 휴식과 충전을 위해서 숨을 고를 수 있는 사적 공간을 말한다면, 언택트는 나에게 잠시 관심을 꺼달라는 절실한 요청이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져 있는 상태이다. 이 언택트 마케팅이 대단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말 걸지 말라는 이런 류의 마케팅이 상상이나 되었겠나 말이다. 불편한 소통 대신 편안한 단절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가족끼리 집에서 카톡으로 대화하는 시대 아닌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파란색 쇼핑백을 들면 점원이 말을 걸지 않는다거나, 교토의 택시회사에서 침묵 택시 운영으로 화제였던 게 마케팅 차원에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시도하는 키오스크 주문 결재, 스타벅스의 사이렌오더라고 근처 쯤에서 스마트폰으로 미리 주문하는 일, 백화점..등등 참으로 많이 번졌다.  뭔가? 침묵과 비대면이 마케팅이 된다.

의경에서 케렌시아와 언택트까지 왔다.

意境을 내 방식으로 풀어 보았다. 지금, 여기서의 풍류라고 했다. 의경에는 공간에 대한 한정이 있고, 지금 여기서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시대가 변하고 사고와 사상과 철학과 관점도 변화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예술 미학의 큰 범주인 의경의 풀이도 확장되어야 한다. 물론 본 뜻을 지닌 채 나아가야 한다. 지금의 의경은 空間 意象을 넘어서서 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사색과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며 적용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 象外의 象이 되는 것이다. 이미 상외지상이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그런 면에서 언택트에 익숙한 세대의 케렌시아적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상외지상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의 지혜여야 한다. 조금도 낯설지 않고 이상할 일 아니다. 시대를 읽는 모든 것이 인문학이라면 공간에서 사람을 읽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인문학적 사고이다. 의경은 이렇듯 하나씩 그 의미를 더해가고 바랜 의미를 정련하여 더욱 빛내는 살아있는 미학원리로 거듭날 것이다. 물론 내 방식의 풀이에는 풍류에 대한 또 다른 분석틀이 고민되어야 함을 전제하는 것이다.

Read More

그 사람의 진면목

Posted by on 9월 27, 2018 in 意境과 담장 | 0 comments

내내 정리하고 또 흐트려 놓는다. 그 자리라는게 주어짐이 아니라 등장과 퇴장의 잠깐 사이에 놓였다. 개미굴에 들락대는, 내 것이라고 주어짐이 우스운 까닭이다. 선호라는 게 추구하는 대상에 달려 있겠지만 결국 손 타는 국면과 상황이 진면목으로 작용할 게다. 입으로는 세상의 부조리에 진절머리 치듯 차고 명징하여 우러러보는데 제 자식 자기 손 타는 행위에 대하여는 관대하다. 입과 스스로의 업이 비틀려 있다. 그러니 갓 쓴 양복이고 칡인지 등인지 후광이 엷다. 절로 믿음이 가다 되돌아 온다. 바라보자니 면목이 없어진다. 해서 흐트려 놓고 끄집어 낸다. 그대로 자리 보전하게 둘 수 없으니 흔들어 섞어서 고른다. 옥석을 가리자는 게 아니라 욕심을 어떻게 부렸는지 되짚어 찾아내는 일이다. 왜 그랬을까. 그때와 지금은 어찌 다를까. 달라진 게 없는 것인가. 닳고 곪고 진물나는 곳은 없었는가. 해서 버릴 것과 지닐 것의 구별이 바로 서는가를 뚜렷하게 직시한다. 정리하는 하루를 예비하여 차를 우린다. 흐트려져 난장인 세상 한 가운데를 우직하게 중심 잃지 마라고 보온병 3개에 우린 차를 담는다. 어질러 놓고 모양내서 차 마시겠는가. 차맛이 달라도 몌마른 입안을 헹구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이 구석 저 구석 애정이다.

Read More

큰 맛과 귀한 만남

Posted by on 2월 27, 2017 in 意境과 담장 | 0 comments

식은 차를 보온병에서 따른다. 24시간이 지났다는 말이다. 보온의 하루를 외면하였겠다. 황차의 풍미가 입안을 씻어낸다. 추사는 말년에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의 달관을 주련에 담았다.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

부러움 없이 큰 탈 없이 살던 추사가 겪었을 곡진한 삶과 영광과 과오와 빛나던 업적에 어울리지 않을 촌스럽기도 한 말이 자꾸 되살아난다. 고기를 즐기며 산해진미를 아는 사람이, 고관대작을 지나 동북아의 내로라는 학자까지 교류했던 사람이어야 가능한 깨달음이고 추사였기에 값진 말이다. 식은 황차 한 잔이 하루를 준비하며 정좌하여 차를 우리던 시간에 주파수를 넘긴다. 두부, 오이, 생강, 나물같은 찬이 가장 훌륭한 차림이라는 말이다. 집에서 먹는 소소한 찬에 둘러 앉은 그림이다. 가장 멋지고 의미있으며 귀한 만남의 자리는 부처아손, 즉 부부와 아들 딸, 손주들이라는 말이다. 소박한 만남이 귀하다. 귀양과 교유와 필화와 질시와 잘남이 한데 어우러졌던 추사의 말년은 그래서 안타까우면서 빛난다. 빛났던 시절이 있었기에 소박한 집밥과 손주들이 아름다워진다.

 

식은 황차는 뜨거움으로 가렸던 깊은 풍미를 오롯이 드러낸다. 나 이거밖에 없다고 턴다. 안개도 없고 그늘도 없다. 있는 그대로다. 방학 중 연수에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은 생물로 치지 않더라. 보채고 조르는 행태와 일찌감치 연을 끊은 탓도 있다. 이제와 달라지거나 바뀔 일은 아니다. 식었으나 아직 깊은 풍미를 지녔다. 그대로 벗고 살 참이다. 감추고 치장하고 있어 보이는 체 포장하지 않으면 된다. 최고의 맛은 소소한 찬이고 가장 귀한 만남과 인연은 지금 이 자리이다. 천천히 내 방식으로 짚어내고 이룬다. 방식에 연연하지 않는다. 사유로서 내딛고 옳거니 싶으면 무릎을 친다. 추사도 그러했을테다. 굴곡지고 화려한 빛살이 있었기에 이면을 읽어 낼 수 있었으리라.

Read More

잠적

Posted by on 2월 7, 2017 in 意境과 담장 | 0 comments

잠시 흔적을 지운다.
세상의 일원으로 지내온 지나온 날들을 살필 일이다. 생각은 꽤나 진보였고 배려 또한 남다름이었건만 그것을 풀어내는 말은 거칠었을까. 아마 의미 부여와 얼굴 긴장이 상대방을 우울하게 할 거라는 생각에서이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지만 아주 쉽게 풀어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별스럽지 않게, 소탈이 지나치도록 범사에 그러했다.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나 다운 것이라 여겼다. 내가 만들어 낸 업이다. 업을 지었으니 매듭을 허물 때가 왔다. 이제 서서히 되돌아서야 한다. 나 다운 게 없었던 지점으로 태엽을 감는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