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평론

조경 비평과 평론, 전통조경의 방향, 동아시아 조경의 미학 탐구

날마다 바래가는 걸

Posted by on 11월 12, 2018 in 경관/평론, 意境과 담장 | 0 comments

주차장에서 선뜻 눈에 들어 온 장면이다. 뭐라 하지 않아도 저렇게 저물고 낡아 가는 것을, 벽면을 향해 자라고 있는 자작나무 풍경이다. 묘하게 눈길이 자주 간다. 식상하지 않는다. 어떤 의도였는지 식재 설계를 되돌릴 필요 없다. 벽쪽이 좁고 양 식재 간격은 아슬하다. 딱 지금 간격에서 모양 나온다. 더 크면, 더 클 것 같지도 않은 환경이지만, 좁고 모난 풍경이 나올 게 분명하다. 지금의 저 모습 그대로만 간직하여도 여전히 아름다운 식재 풍경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축에서 자작나무만 비껴갈 수 없다. 아름답고 이쁠 때, 자꾸 봐야지. 그게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다. 하지만 더 많은 세월이 지나도 저 공간에서 자작나무는 환경에 맞춰 최적의 선택을 할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기를 기대한다. 심기는 사람이 하였지만 10년, 20년 지난 후의 모습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다. 다시 손을 대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보기 싫다가 다시 보기 좋아지는 것은 묵히고 익히며 발효시키는 우리의 미의식과 닮아 있다. 자연도 스스로 제어하는 기능을 알게 모르게 발휘한다. 보기 싫었는데, 다시 보니 보기 좋은 모습이 자연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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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숲을 뚫고

Posted by on 9월 28, 2018 in 경관/평론 | 0 comments

왜, 서로를 서로라고 하지 않나

부소산성의 아침은 분주하다

저린 언저리 잠깐 쉬는거야. 걷는 게 아니라고. 신기하게 복자기나무와 이팝나무가 많다. 복자기나무는 군창지 주변에서 잘 자랐다. 문화재사업소 광장에서 생활체육 에어로빅은 어디나처럼 활기차다. 많은 날들이 에어로빅으로 은혜로웠으면, 하늘과 땅에 고하는 혈류 왕성한 고백의 시간.

곳곳 가을길 장치이더라

끝 마르며 자람이 더딘 단풍나무의 잎도 서두른다. 버틸만한 에너지는 소멸되었다. 이른 단풍으로 추워 보인다. 큰나무 곁에 심은 복자기나무는 나무젓가락이다. 숫자 채우기에 공조하였겠으나 세월 지나 훌쩍 떠나간 옛 사랑 아쉽듯이, 햇살을 가렸으니 서로에게 서로가 되지 못한 묵언의 야멸찬 외면이었으리. 외면처럼 차고 못된 게 있으랴. 오석 깎아 앉게 만든 돌벤치에 앉는다. 엉덩이로 뼈까지 지르는 한기에 정신이 오롯하다. 오래 앉아 있는 게 수양이라.

수석 돌벤치

언덕 얕아 보폭도 정중하다

부소산성의 사비루 알현을 회곡점으로 삼는다. 운동 나온 이들의 다리 찢는 왕성한 육신의 기능에 늘 놀란다. 저들이 하는 것 중 따라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걷는 단정함이 다이다. 단정하게 걷다 보면 생각도 보드라워진다. 고란사 신형 산타페가 놓여진 자리에 없다. 사비루는 모든 것을 알고 있겠다. 백마강 삼천궁녀 이후로 사비를 둘러싼 산맥은 더더욱 울렁울렁 겹겹이 에워 싼 게 분명하다고. 아침 강물은 기지개 펴느라 잔잔하다. 도도한 금강의 줄기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장하고 의젓하다.

백마강, 멀리 오솔길을 걷는 날

배 고픈 상황 말고는 급한 게 없다

부소산성 정상에서 지하수로 입을 적신다. 산성을 걷고자 나섰건만 정확하게 길의 경로를 그을 수가 없다. 고란사 눈길로 읍하고 소나무 숲 언덕에서 산성의 기운을 느낀다. 사람의 발길로 어루만진 흙길이 순정한 도타움으로 살갑다. 충분히 더 많이 머물러 소요한다.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판단한다. 그럼에도 붙잡는 일이 다가오면 모른 체 넘어간다. 받아 주는 게 배움이고 공부이다.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사잇길이야 말로 사람의 길

처음부터 이정표는  없었다

길은 사람의 마음에 나 있다. 해서 마음이 지나가고, 스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은 나 있다. 길에는 비슷한 사람의 마음이 배어 있다. 그의 마음과 내 마음이, 내 마음과 너의 마음이 어디쯤에서 만났을까. 길은 안다. 어디에서 그들의 마음이 만났는지. 안타깝고 섭섭하며, 기쁘고 신났던 지점의 유전자가 길의 단단함이 된다. 처음부터 그들의 마음이 내어 준 것이라, 길은 온전히 길이 아니다. 길은 마음이 내다 놓은 바깥의 풍경이고, 마음은 길이 주워 담은 풍경으로 그득하다. 길과 마음은 서로에게 기대도록 내 준 담장이 있어 내외할 수 있다.

담장처럼 마음과 길이 서로에게 서로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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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도시 경관

Posted by on 1월 26, 2013 in 경관/평론 | 0 comments

장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도시 경관

소나무도시

장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도시경관 / 온형근

도시마다 소나무다. 마치 소나무를 심지 않으면 지방자치제의 근본이 흔들리는 듯이 심는다.지금까지는 굽고 몰아치며 키가 들쑥날쑥인 채 모아심는 소나무 군식이었다. 지금처럼 장송이라 불리는 금강송 계통의 소나무가 심어진 것은 짧은 기간이다. 그런데 짧은 기간에 장송이라 불리우는 소나무가 도시에 가장 많이 심겨졌다. 가나안조경이라는 회사는 장송을 공급하는 주된 회사다. 그 가나안 조경이 보유한 장송이 바닥이 났다고 한다. 너도 나도 심었다 하면 장송이다. 일직선으로 뻗은 미려한 수형이 평면적으로는 부등변삼각형으로 식재된다. 그러면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수형으로 보면 정방형식재를 위주로 한 정형식 식재 방법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소나무는 자연식 식재인 임의식재가 어울린다. 소나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에 이미 자연스러운 소나무의 수형이 어울리는 산하를 가졌기 때문이다. 서울시청을 배경으로 그 장송이 심어져 있다. 웬만한 지자체의 청사에는 모두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듯 그 장송을 심었다. 소나무 에이즈라는 재선충이 언제 강타할 줄 모르는 시점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재선충을 막지 못한다면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진 장송의 소나무 조경은 한꺼번에 도시에서 무너질 것이다.

소나무는 우리와 친구다. 태어나서 금줄에, 살면서 농기구를 포함하여 자고 먹고 생활하는 한옥에까지 소나무는 친구다. 관을 짜도 소나무로 만든 것을 최고로 쳤다. 이렇게 소나무가 친근했던 것은 우리 산하의 풍경이 소나무로 이루어진 경관의 유전자를 지녔기 때문이다.  조상을 모시는 데에 송편은 어떤가. 송편이 없는 추석을 상상할 수 없다. 소나무가 줄고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둘러선 북한산 등 많은 산들의 소나무가 이미 산 중턱 이상으로 옮아가고 있다. 장송을 커녕 굽은 소나무조차도 줄고 있다. 소나무의 기운을 받아야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유전자는 병들고 있다. 아님 새로운 유전자를 기르고 있다. 소나무는 맨땅에 씨앗이 떨어져야 종족을 번식시킬 수 있다. 우리의 농경문화는 열심히 낙엽을 긁어 모았고, 땔감을 채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나무는 무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소나무는 갈 곳이 없다. 참나무류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자연상태의 식생 천이가 그렇다. 인간의 적절한 간섭이 있었기에 소나무는 우리 산하의 풍경이 가능했다. 이제 소나무의 풍경을 자연에서 보는 게 힘들어진 상태다. 그래서 도시경관에 소나무를 끌어들였을까.

도시의 소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다만 조경 기술의 도움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한다. 생명을 부지한다. 도시의 소나무에는 윤기가 없다. 현대인의 생활처럼 약과 수술과 의사의 처방에 길들어 있다.  만약 재선충이 들어오면 졸지에 도시는 황폐한 경관으로 변한다. 미처 대체 수종을 식재하지 않은 탓이다. 중부지방은 상록침엽수로 심을 것이 마땅치 않다. 예전 관공서는 향나무 위주의 경관을 꾸려나갔다. 그게 일제의 잔재라 청산할 권위적 상징이라 허물어졌다. 그래도 아직 초등학교 등 학교에는 많은 향나무가 본관을 중심으로 화단에 우람하게 식재된 채 유지된다. 향나무의 전정은 손이 많이 가고 관리 및 유지에 인력이 많이 소모된다. 근래 공직에서의 일이라는 것은 기구를 들고 땀을 흘리며 잠깐씩 몸을 태우며 봉사와 겸양을 배우는 일을 회피한다. 다만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며 보내는 일이 진지하고 진정한 공직의 일이 되어 있다. 그러니 향나무는 버려지거나 용역 회사에서 그 일을 맡는다. 같은 공직 생활을 하면  직급에 관계 없이 너도 나도 인터넷을 하는 것으로 평등을 경험하고 쾌감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소나무가 문제다. 도시경관이 병들어 있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경관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고비용의 도시 경관의 창출과 달리 가장 실패한 도시 경관의 경험을 체험하게 할 수 있는 경관  구성이다.

큰 도시가 도시 경관을 구성하거나, 청계천을 복원하면, 그 다음 큰 도시가 그 일을 벤치마킹한다. 경관은 처음 창안한 것에서부터 처음 모방한 것, 그다음 또 모방한 것….다다음 모방….으로 갈수록 초췌해진다. 일 잘하는 장인이 경관을 만들었던 것을 청년이, 그리고 학생이, 그리고 초등학생이 만들어 놓은 경관으로 역행한다. 그렇다고 소나무를 위하여 다시 낙엽을 긁고 땔감을 베고 할 수는 없다. 천연 식생 천이에서는 그렇다. 포기하기에는 소나무가 우리 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 크다. 이쯤에서 소나무를 다시 생각한다. 도시경관에서의 소나무는 치도곤을 하더라도, 산하에서 소나무를 어찌 유지할 것인가도 생각한다. 목수의 공구는 거의 소나무를 다루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부재산주의 산림경영이 필요하다. 부동산이 재산 축적의 용도로 땅값 상승에만 기대하기에 산림경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산림청에서는 부재산주에게 알린다. 산림경영을 대신해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신청하는 사람은 적다. 소나무로 이루어진 정신문화를 승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소나무를 산하에서 잃었을 때, 그때는 너무 늦다. 그래서 도시경관에서 하늘을 찌르듯 여러 그루가 서로 의지하며 지주목에 기댄 채 서 있는 장송의 경관은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지방자치단체 모두가 소나무, 그것도 장송이어야 할까. 그 비용이면 지자체의 산에 소나무 관리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수 있다. 자연 경관을 창출할 수 있는 먼 미래를 가져야 한다. 천연 식생 천이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대로 두면 소나무는 사라진다. 인간의 적절한 간섭과 조절이 있었기에 한국의 산하, 한국 사람, 한국 문화에 소나무가 녹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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