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착/교육

보이지 않는 들판

Posted by on 2월 10, 2019 in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내 스스로는 알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놓치고 슬금슬금 침묵하는 것이 남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햇살이 내리 쬐다가 금방 사라지는 입춘 전후의 사정이란 대개 그렇다. 새로운 기운으로 우주가 술렁이는 게 분명하다. 대체 왜 이리 어수선한가. 여행과 새로움과 기쁨과 들뜸이 소란하다. 잠깐이라도 왁자지껄 흐뭇하면 그만이다.

저 들판은 오늘도 겨울이다. 말이 없듯이 풍경도 고만하다. 속은 뜨거운데, 겨울 나는 동안 입을 다문 정황이 노골적이다. 들판에서 쏘아대는 기운에 잠시 노곤함을 잊는다. 근데, 이것도 아니다. 삶의 습성이 강약의 리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서 놀란다. 살아가는 데 조금도 도움되지 않는 게 일관적인 습성이다. 사람은 일관적으로 사는 게 죄악이다. 수시로 절기만큼은 변해야 한다. 어째 수도 없이 아름다운 세상을 그저 그렇다고 일관하여야 할까. 

슬플 때는 슬퍼야 하고, 신날 때는 신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옭아 맨 채, 조심조심 살얼음 걷듯 채질한다. 봄바람이 불면 그래서 외면하고, 비가 오면 그래서 피한다. 단풍이 들면 어느새 하다가 겨울 맞이한다. 겨울이어서 감출 수 있는 게 많다. 저장하는 시기라 그러할 것이다. 슬쩍슬쩍 노래 부르며 어느 특정한 한 때와 나이를 버리고자 한다. 이렇게 고요할 수가 없다. 금강이 부여를 만나 백마강의 이름을 얻었다고, 그 이름으로 덧씌워 흐른다고, 나 또한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남쪽의 매화 소식을 손으로 꼽으며 수원의 와룡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골짜기 깊은 한 시절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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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만들어내는 신생의 길을 수소문한다

Posted by on 1월 20, 2019 in 조경문화콘텐츠::與言齋 | 0 comments

조경수목을 문화콘텐츠로 바라보는 시각

모든 이의 삶이 융합이고 그가 살아가는 자체가 인문학인 것이다. 나라는 주체와 바깥 대상이 만들어내는 틈새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조경수목을 문화콘텐츠로 바라보는 시각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사람과 뗄래야 뗄 수 없이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게 나무이고, 숲이다. 인류의 문명이 숲의 처소를 빌려 빌딩을 세웠듯이, 조경가는 끊임없이 숲을 경외하며 사람과 나무의 관계에서 새로운 환경의 단초를 읽어내야 한다. 옛 사람의 생각과 그 시대적 상상력의 복원이야말로 문화콘텐츠 창작의 원천이다. 조경수목에 문화콘텐츠의 동력을 입히는 일은 조경가의 또 다른 사회적 역할이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출발할 때, 세상은 살아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환경에서 나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친밀한 게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 주고 받은 과정에서 만들어낸 생활 양식 자체가 문화이다. 나무와 사람이 소통하여 만든 기술, 예술, 관습, 양식 등 참으로 넓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사람의 생활 활동에 목적 의미소를 지닌 행위가 있고, 행위의 산물로 이어지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게 문화라면, 문화의 중심에 식물성 사유가 놓인다. 식물성 사유는 곧 생태적 지혜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생의生意’를 인지하는 것이다. ‘생의’는 천지자연에 널려 있고,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다. 해서 ‘살아있음’으로 이치를 깨우치게 한다. ‘도道’에 다름아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도’를 이루는 과정은 그래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는 내가 바라보는 시선의 측은지심과 생명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된다. 우주만물의 ‘살아있음’에 다다를 때, 나무는 새로운 의미와 상상력과 문화콘텐츠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된다. 그래서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책에 수록된 조경수목들은 학교에서 파종하여 기르고 옮겨 심고 가꾸어 보았던 나무들에 대한 콘텐츠이다. 직접 내 몸과 부딪혀서 내 안 깊숙한 곳에 꿈틀대는 나무들이다. 하나같이 주마등처럼 내 기억의 세포들을 불러일으키는 나무들이다. 가능하면 나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직관적인 감성을 근거하여 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나무에게 다가가는 올바른 길이다. 그런 다음에 나무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탐구하면 될 것이다.

하심의 세계는 나무의 세계이다.

사람에게 나무는 동반자이고 나무와 사람이 만들어 내는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 영역을 둘러보고 산책하는 일이 나무의 인문학일 것이다. 인문학이 내 실생활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문화이고, 문화는 끊임없이 재탄생되어 전해지는 특성을 가졌다. 그 과정에 내가 존재한다. 공허한 울림이 아닌, 몸으로 전해지는 감성과 직관의 자양분은 노동이며 땀이다. 나무를 심고, 캐고, 현장 설계하며 다급한 외침이 존재하는 긴급한 상황 속에서 나무의 콘텐츠를 생산하였다. 그 세월에는 미처 몸을 풀지 않고 해동된 땅에서 시범 보이는 삽질의 봄도 함께 한다. 내 손목의 앨보와 허리는 그때 이미 고장 날 것을 예고한 것이다. 땀 흘린 오후에는 막걸리가 있어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나무와 함께 생활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 층지지 않고 참하게 보인다. 나무는 그 어렵다는 경지인, 하심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세계는 나무의 세계다. 아무 때나 만날 수 있고 툭툭 속마음을 털어낼 수 있다. 나무를 쳐다만 보아도 내가 귀해지는 일이건만 서로 나눌 콘텐츠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신생은 수소문, 매일 아침 예비되어 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만들어 내는 신생의 길은 수소문으로 가능하다. 눈 뜨고 일어나면 이미 신생의 길이 놓여 있다. 그러니 찾아 나설 일이다. 새로울 것 없는 나무에게 신생을 수소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살아가는 일이 신생이어야 한다. 이 책은 조경수목으로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로 구성되었다. 다섯 개의 꼭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꼭지는 낙엽활엽관목에 해당하는 조경수목이다. 고개를 숙이고 찬찬히 살펴보면 말을 건네 온다. 두 번째 꼭지는 계절을 연결하는 눈높이에서 만날 수 있는 낙엽활엽교목으로 구성하였다. 세 번째 꼭지는 시원한 바람과 흔쾌한 몸짓을 구현하는 낙엽활엽교목을 배치하였다. 네 번째 꼭지는 강건하게 보살피는 의리의 나무들로서 상록수를 다루었고, 다섯 번째 꼭지는 특별히 근사한 미인으로 비유한 만경목과 지피초화류로 구성하였다. 각각의 콘텐츠에는 나무와 얽힌 내 자신과의 교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문화콘텐츠로서의 운문과 산문이 적절히 녹아 있다. 곳곳에 나무의 에스프리를 운문으로 작성하였는데, 이는 낭독을 하여도 울림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만의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작성해보는 것을 권한다.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는 생산에 기반을 둔다.

조경 교육 현장에서 조경 수목에 대한 수업을 진행할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조경수목학을 어떻게 활기 있는 수업 장면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나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배우는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여 뿌듯함을 지니게 하는 방도는 없는 것인가? 그렇게 시작한 것이 문화콘텐츠적 접근 방법이다. 스토리텔링을 접목시켜 내 가까이에 조경 수목이 존재하는 것을 어느 순간 퍼뜩 깨닫게 하는 차별화된 교수 방법이다. 주변에 있는 조경 수목에서 깨달음을 찾아내는 방법이란 대상이 되는 한 나무를 나와의 관계를 선정하여 이끌리는 나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검색하고 사색하며 탐색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해하는 방법을 말한다.

“다들 ‘돼지’라고 하면 살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돼지 다리가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돼지에 개 정도의 다리만 달아줘도 비대해 보이지 않는다. 다리가 짧으니까 몸집이 뚱보로 보인다. 시점을 바꿔 보면 대상이 달라진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알려면 검색하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려면 사색하고, 미래를 알려면 탐색하라. 검색은 컴퓨터 기술로, 사색은 명상으로, 탐색은 모험심으로 한다. 이 삼색을 통합할 때 젊음의 삶은 변한다.

”[출처: 중앙일보] 이어령 “암 통보받아···죽음 생각할 때 삶이 농밀해진다(백성호의 현문우답)“

조경수목학은 한 학기 공부하여 마치는 텍스트가 아니다. 오래도록 묵히면서 접근하여야 하는 하드웨어적 속성을 지닌 교과 과정이다. 그러면서 조경 관련 학문의 가장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전체를 이끄는 아우라를 지닌 교과이다. 생명을 지닌 대상이며, 성장하며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개체의 온갖 순간을 우주에 발현하는 게 조경 수목이다. 곳곳에서 만나며 누구에게나 쉽게 내어 주지만, 아무나 온전히 그를 가질 수 없는 이치이다. 볼 줄 아는 자는 오감으로 예민하게 가까이 할 것이지만, 스치듯 무심하여 온갖 순간을 뭉뚱그려 하나의 이미지로만 인지하는 자에게는 그야말로 먼 나라 뭉게구름 하나 떠다니는 한 번 흘낏 보는 행위일 것이다. 누가 더 세상을 윤택하게 가꿀 수 있겠는가. 조경수목학 공부 방법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창작하는 데 있다. 일단 글쓰기를 통하여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입혀 나간다면, 어느 순간 조경 수목에 대한 공부가 재미있고 다양한 수목학 용어들이 친근해진다. 조경 수목을 검색과 사색, 탐색의 삼색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이제는 직접 대상과 관계 맺기에 돌입하여야 한다. 주의깊게 파악하는 관찰, 음미하고 생각을 펼치는 고찰, 담박에 전체 구조와 흐름을 파악하는 통찰, 이 세 개의 삼찰이 관계 맺기 방법이다. 여기에 더하여 나의 내면을 대상으로 진전된 살핌인 성찰이 필요하다. 삼색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정립하고 삼찰로 관계 맺으며, 성찰을 통해 문화콘텐츠로 창작하는 조경수목학 공부 방식을 권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경 수목 공부의 시작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 생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훌륭하다.

조경문화콘텐츠창작소『나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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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사리암 가는 길에서 묻는다- 사리암

Posted by on 1월 6, 2019 in 아름다운산책::온숲 | 0 comments

021. 사리암 가는 길에서 묻는다.-호거산운문사 사리암 / 온형근

세상에 드러나 있는 것들의 존재감

사리암을 찾았다. 20주년에 이른 조경문화답사동인 ‘다랑쉬’의 회장단 신년교례회를 울산에서 열었다. 20년을 회고하자 했으나, 묻어 버리자고 했다. 다가오는 미래의 20년을 내다보자는 제안이다.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대화가 좋다. 자연스러운 이야기에서 禪語를 잡아챈다.  그렇게 20년의 시간은 서로 비기고 있었다.  다음날 청도에 있는 사리암을 찾기로 한 것은 예정과 상관없이 저절로 이끌리는 귀한 인연이었다. 운문사 가는 가지산을 넘으면서 탄복한다. 세상에 드러나 있는 것들의 존재 가치를 짐작하고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대한민국 곳곳이 비경이다. 자꾸 들락대며 힘들게 일한 경제를 굳이 외국 풍경에 쏟아부을 일이 있을까. 짧은 여정에 센 자극이 필요한 단초이다. 걷듯이 여유로운 곳곳의 이 비경을 다 어쩌면 좋을까, 내려서 걸어도 시원찮은 판에 울산에서 가지산을 거쳐 운문사를 향하는 그 길 자체가 아름다워 산 넘기가 왜 넘어야 하지 하는, 의미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사전 지식 없이 어딘가를 나선다

평지 가람인 운문사가 웅장하다. 청도를 다녀 본 적이 없었기도 하겠지만, 운문사의 규모에 놀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녔을까. 그들을 위무하고 꿈을 심어 주는 사찰의 기왓장, 기둥 하나는 또 어떤 슬픔과 기쁨을 숨겨놓았을까. 자동차로 일단 주마간산처럼 지나는데, 자꾸 고개를 돌려 멀리서 전경을 일별 한다. 사리암 주차장에서 계곡을 본다. 물도 맑고 대단한 위세를 감지한다. 산 첩첩 물 곡곡이다. 중첩되어 서로를 빗기면서 빗장처럼 열고 닫고의 연속으로 깊어지는 산이다. 그 호젓하고 깊은 내밀한 중력의 이끌림으로 흐르는 하천은 계곡이 되어 청명한 하늘만큼 청정하다. 이미 저 산 꼭대기쯤에 법석을 차렸을 사리암의 위의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표지석 앞에서 합장 3배를 한다. 늘 그렇듯이 사전 지식 없이 어딘가를 나서고 다녀오는 것은 즐겁다. 현지에서 다가오는 임장감이 그지없이 좋기 때문이다. 세상에, 세상에….邪離庵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문장 기술 방법이다. 부처님의 사리 정도로 생각했다가 큰 반전에 이른다. 간사하고 사악한 것들과의 이별이라니, 그들을 떠나보낸다는 것이니 깜짝 놀란다. 

사리암 오르는 길의 선명한 시선

사리암을 오르는 길에 각목 지팡이 소리가 산을 크게 울린다. 꽤 많은 중생들이 오르고 내린다. 이 곳을 매일 다닌다는 분이 존경스럽고 경외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반반씩 나누어서 조상도 모셔야 한다고 했더랬는데, 급격히 조금씩 다른 생각이 자리 잡는다. 그대로 그냥 일상이어도 한없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전환된다. 매일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늦게 논문 쓰고 공부한답시고 부족한 운동량을 탓한다. 그래도 언덕을 오르는 일은 늘 거뜬하고 시원하다. 내리막이 외려 불편하다. 함께 사리암 가는 길에 동승한 다랑쉬 동인들의 표정도 거뜬하고 밝다. 까마귀 소리가 나서 둘러보니 하늘이 새파랗다. 산마루를 배경으로 선명하여 침침한 시력이 되살아나 멀리까지 맑게 잘 보인다. 

보내야 할지 담고 있어야 할지

사리굴 아래 가방을 두고 천태각을 오른다.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나반존자를 모신 각이다. 함께 동행한 다랑쉬 신입 회원은 사리굴에서 108배를 시작한 듯 몰입이다. ‘나만은 변함없이 가난하게 살게 해 달라’라고 소원을 빌었다. 산마루 근처 사리암의 이런저런 구조물 모두가 놀랍다. 사람이 마음을 먹고 움직이고 그리하여 그리 되도록 애쓰는 일이 늘 놀라움이었듯이, 이런 것을 대상이 어디든 모두 공력이라고 부른다. 그 공력을 모으고 사용하고 하는 반복이 계속된다. 공력에도 사악함이 스민 공력이 있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사이 나의 공력이 사악함으로 물들어 있는지를 자주 펼쳐보아야 한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마음의 거울에 비춰보아야 한다. 자신만이 자기의 내면을 볼 수 있다. 그것도 보려는 노력이 있을 때야 가능하다. 그래야 내 안의 사악함과 이별할 수 있다. 분명 사리암은, 세상의 사악함과 나를 별리시키게 하여 달라는 기도보다는, 내 안의 사악함과 헤어지는 준비를 하라는 가르침이다. 떠나보내야 할지 담고 있어야 할지를 내가 정하라는 말, 그게 사리암의 준엄함이다.

천태각 계단을 내려오며 묻는다

천태각 나반존자를 친견하고, 가난함을 즐길 마음을 공유하고 내려오는데, 마지막 계단에서 정수리로 툭 떨어지는 게 있다. 고드름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영험하다는 사리굴을 이루는 거대한 암벽이다. 작은 골 사이가 젖어 있다. 그곳에 미량의 수분이  흐르며 얼어 모였다가 떨어지는 경우이다. 가끔 작은 돌멩이가 떨어진다고 한다. 고드름에 맞닿은 경우는 금시초문인가 보다. 기도에 대한 응답 이리라. 잘되라는 기도에는 돌멩이로 응답하지만, 여기서 더 낮춰달라는 기도에는 고드름으로 응답하나 보다. 혼자 그렇게 여겼다. 산신각으로 향한 발걸음은 이곳이 혈처임을 스르륵 느끼도록 몸이 반응한다. 묘한 떨림을 경험한다. 그 사이, 오고 가는 많은 이들이 새롭다. 한 가족 3대가 오르기도 하고, 젊은 처자들이 왁자하게 다니기도 한다. 자동차로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좋은 곳도, 30분 넘게 다리 후들거리며 오르는 곳도 서로에 대한 가감을 매길 수 없다. 가만있는 사람 툭 쳐서 건드려놓는 일군의 바람잡이들을 조심할 일이다. 멀쩡한 생사람 곪는다. 이 또한 모든 것이 내게서 비롯되었음을 다시 더 각인한다. 누군가의 사악함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남의 사악함을 보기 전에 내 안의 사악함을 먼저 본다. 그리하여 더 커지기 전에 크기를 줄이고, 형태를 다듬는다. 그래서 지붕 위의 막걸리를 시청하였나 보다.

(201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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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공감하는 글 모심

Posted by on 12월 4, 2018 in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송석호

8분 · 

본인은 근래에 보여지는 ‘정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증대를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깊다. 학문과 사회의 이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학계를 구심점으로 관공서와 업계활동이 순조로워야 하는데, 현 시점에서 ‘정원’이라는 용어자체가 관공서와 업계가 중심이 되어 현대정원의 모습과 흐름을 주도하고 있고 학계의 역량은 미미한 느낌이다. 이렇게되면 국가정원법과 같은 시행착오가 계속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학계가 미치는 역량이 부족하다보니 한국정원에 대한 질서와 정의가 혼미해 이에 대한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지금의 정원의 모습을 범 세계적 흐름에 호응하는 ’21세기 한국정원’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불과 100년전에도 이어오던 전통정원의 본질과는 이질감이 커서 본인은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다. 이는 정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시대사조, 종교, 국민성, 자연환경중에 시대사조가 바뀌었기 때문으로, 세계적인 이념이 동일시 되기에 정원의 형태나 이상향도 유사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랜 기간동안 계승되어온 전통정원은 현대정원과 본질적으로 융화되지 못하고 단절된 형태로 과거의 모습 그대로 모방하여 찍어내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순천만, 세종시 등등). 이 또한 학계의 영향력 부재라고 꼬집고 싶다.

한국전통정원이 아름다운 이유, 혹은 특징을 ‘가꾸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는 시각적 접근을 통한 과정이 만들어낸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의 정원이 심미적, 미학적, 생태적 등의 시각적인 요인을 중요시한다면 전통정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과 같아 철학적 요인을 중요시 해왔다. 정원의 궁극은 플라토닉처럼 정신으로 진화한다. 진화해온 전통정원의 본질을 조금만 더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 이어갔으면 하는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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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는 어떻게 자유와 만나는가

Posted by on 11월 22, 2018 in 휴림산방,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버려진 자전거는 어떻게 그 자유를 얻었을까”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은 1974년에 출간된 책이다. 네루다가 1973년 9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70 노인의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온갖 물음을 300개 넘게 던졌다. 버려진 자전거에서 비로소 자전거의 자유를 발견하였다는 구절에서 나 또한 안도한다. 내 유배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게 뭔가. 어디에 소용되는 건가. 내게 필요했던 것이었던가. 부자유스러웠던 건 또 어떤 게 있었다는 건가. 충분히 부자유스러움과 맞서서 세상을 살아왔던 게 아닌가. 그래서 많은 것을 버린 것 아닌가. 속하다, 속하다. 속한 것에 스며드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 부적응이라고 했다가 아니야, 부자유스러움은 모두 떨치자 했던 것 아닌가.

지금은 자유가 곧 침묵인 상태에 놓였다. 침묵이라기보다는 칩거일 것이다.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 줄고, 혼자 중얼대다 만다. 힘들다. 체질적으로 분주했던 생활에서 저만치 물러나 있다. 스스로 선택해서 귀한 근거를 만들어 찾아든 유배이다. 힘드니까 친구가 보인다. 먼 친구가 많았구나. 어려울 때 친구가 보인다더니 꼭 그렇다. 가족도, 동료도 마찬가지이다. 고난은 사람을 가려내는 힘을 지녔다. 시린 한 편을 따스하게 덥히려 노래를 듣는다. 새벽부터 스멀대며 벽을 타고 넘어오는 세탁기 돌리는 소리는 이제 좀 참을만하다. 존재의 근거를 어느 정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에서 이해가 되면서 그 소리의 데시벨은 낮아졌다. 꽉 막힌 생각은 불통이다. 유연한 사고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세탁기 소리에 맞서는 음악을 유튜브에서 틀었다. Leonard Cohen이다. 그의 동굴 속 깊은 심연의 고독이 이 아침에 잘 어울린다. 어디 세탁기 소리가 범접이나 하겠는가. 저 주문처럼 번지는 아득함이 좋다.

나 또한 볼륨이 클 줄 몰라 15% 크기로 낮춘다. 혼자 듣기에 딱 좋은 크기이다. 그냥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곳의 생활은 잿빛 짙은 가라앉음이다. 겸손한 것일까. 겸손한 척하려는 것일까. 하기사 분노가 좋을 리는 없다. 문제는 내 자존에 관한 진행일 것이다. 좀 더 두고 보자는 심보일 것이다. 당당하다는 것은 되도록 비굴하고 조잡한 일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시선을 멀리 두는 것이다. 원대함까지는 아니지만 가슴에 서늘한 뜻을 의미 있게 세운다. 자꾸 되뇐다. 그래서 그 끝은 어디인가를 묻는다. 여주와 수원의 제자를 묶어서 밴드를 만들었다. 내 의도는 모두들 친구이고, 내가 엮어서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옛 제자를 위하여 명예의 전당 밴드를 추가하였다. 내가 현역에서 못한, 마지막 현역 직무를 수행한 것이다. 과연 이들은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두고 볼 참이다. 잘되기를 바라고, 잘 되었을 때 기쁘고, 도울 수 있을 때 즐겁게 다가서는 그런 존재로서 서로에게 친구가 되라는 덕담이다. 기분 좋은 날, 가령 1년에 1번 정도 만나 곡주라도 나누면서 격의 없이, 나를 포함한 모두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는 자리를 펼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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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말라가는 낙엽

Posted by on 11월 19, 2018 in 조경문화콘텐츠::與言齋 | 0 comments

형체마저 변하고 있어

울긋불긋 황토에 옷 입히더니, 젖었다 마르기에 으스러지고 있는 중이다. 탄력을 잃고 밟는 동안 낙엽은 귀 떨어져 나간다. 질긴 엽맥이 있어 여전히 미끄럽다. 계단길을 두고 경사지는 한겨울 굴러 자빠질 층을 가꾼다. 평지와 달리 오르내리는 완급이 매력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산길은 오솔길이다. 점퍼를 열고 운동량을 확인한다. 낙화암, 고란사는 단체로 왁자하다. 부소산 굽이굽이 길 따라 저린 통증은 되살아난다.

백운동 원림이 다가오길래, 이쪽이려니 했다. 그러다 와룡매 인연이 다가선다. 급한 물살을 타고 주제를 와룡매 쪽으로 돌린다. 문화유산이고, 후인에게 전해줘야 할 콘텐츠이다. 역사적 사실과, 묻히고 말 뻔했던 기록을 문화콘텐츠로 작업하는 방향 하나를 설정한다. 산책은 생각을 좀 더 다듬고 알맹이로 빛내주는 데 좋은 역할을 해낸다. 시키지도 않았건만 기어코 몰고 간다. 둘 다 문화콘텐츠로 규정한다. 식재와 공간이다. 식재도 공간도 살아 움직이는 실체이다. 실체를 대상으로 해야 실존의 가치를 공유한다. 뭣 때문에 화두를 다루고 있는지, 궁극의 지점은 무엇인지를 자꾸 되새긴다. 어디를 향하고 있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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