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착/교육

생각을 풀어 놓는다

Posted by on 9월 4, 2019 in 아름다운산책::온숲 | 0 comments

무릎이 울컥하여 일찍 누운 탓일까. 깨었으니 물러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차를 우렸다. 구월이다. 마른 입에 찬물 몇 잔으로는 잠을 청해도 소용없으니, 아예 차를 우린다. 내친김에 일상에서 몇 안되는 새벽 고요와 만난다.  

‘한국전통조경의 미적 범주 체계 정립’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일지를 쓰듯 생각을 쏟아냈다. 어쩌면 소명처럼 받아들이면서 다가섰다. 그 와중에 몇 가지 생각들이 왔다가 떠났다.  ‘한국전통조경 기능 인력 양성 프로그램 개발과 교육과정 적용’은 유보되었다. 심지어 ‘문화재조경기능자 출제 및 선발에 관한 제언’ 역시 원자료를 획득하는 어려움으로 3개월을 머물다가 자료만 무성한 채, 불을 당기지 못했다. 많은 스트레스로 시달렸다. 결국은 원자료의 비공개성을 공론화된 연구 환경의 조성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매듭짓고, 훗날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문화재단청기술자’에서 ‘문화재조경기술자’로 획득 기술을 모색하였다가 현장의 두 멘토의 완곡한 끄덕임에서 쓸모있는 곳에 진력하여야 함을 알게 된다. 해서 ‘산림기술사’로 방향을 튼다.

‘도심의 미세먼지 저감 방안’으로 가장 확실한 대안이 ‘도시숲 조성’이다. 산림기술사와 도시숲을 연결할 수 있는 구상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그러다보니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미세먼지로 인한 체육활동 줄어듦의 대안으로 실내체육관 건립을 추진하겠다는 보도를 보았다. 여기서 착안한 게 ‘도심 미세먼지 저감 학교운동장 도시숲 녹지체계 연계 계획’이다. 키워드는 미세먼지, 도시숲, 녹지체계, 학교운동장이다. 학교운동장 변천을 다루고, 학교조경 또는 도시녹지체계인 공원녹지와 연계하는 방안도 그 중 하나가 되고, 도시의 변천과 공원의 관계라는 큰 틀에서 학교운동장을 대상으로 녹지체계 도입론을 주장하는 일종의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실체가 그려지는 주제에 근접한 셈이다. ‘미학’을 전통조경에 적용하려는 것은 범주체계의 기초를 다지자는 의도이다. 경관과 공간과 대상의 물적 현상일 경우 범주체계에 적용할 때, 객관성과 합리성 확보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경관 관련 통계를 사용한다면 연구의 범위가 커지고 좁히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집이나 관련 시문 등을 통하여 전통조경공간의 미적 특질을 찾아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미적 특질을 밝히는 대상과 방식을 정하는 데부터 난관은 시작된다. 

반면에 도심 미세먼지 관련 실내체육관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학교운동장의 변천을 살피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현재의 고민을 반영할 수 있는 대안이 제시될 필요성은 당장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이 일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실용적 연구 영역이다. 사업처럼 여겨진다. 물론 도시숲 녹지체계 연계 계획에서 범주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결과물이 될 것이다. 이름하여 ‘학교운동장 도시숲 녹지체계  범주론’이 될 것이다. ‘도심 미세먼지 저감 학교운동장 도시숲 녹지 범주 체계 정립’으로 귀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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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조경인가, 전통 정원인가

Posted by on 6월 26, 2019 in 조경문화콘텐츠::나무와함께:: | 0 comments

자연이란 숲이다. 숲에서는 모든 게 제 몫만큼 영역을 확보하여 아주 효율적인 생을 도모한다. 숲의 질서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과 다르다. 숲을 베어내고 사람이 자본의 논리에 경제적으로 모여 살며 도시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도시 근교나 산악을 포함한 자연은 변함없이 옛 그대로의 생명의 순리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만 편리함을 추구하는 잇속에 따라 도시의 편익시설과 이로움을 만끽할 뿐이다. 그래도 또 주말이면 자연으로, 숲으로 떠나지 않는가. 산과 계곡이 있는 생명의 원천에 잠깐 머물며 긴 사유를 할 수 있는 명상의 순간이 원림에 있다. 원림이라고 말하면 동아시아 삼국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개념이 내재되어 소통이 가능한 용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조경, 조원, 원림이라는 삼국의 전문 산업 영역으로 개념을 이어가면 느낌이 또 다르다. 전통 공간에서의 정원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가. 이러한 산업 영역으로서 지칭되는 용어가 아니라, 숲을 배경으로 하여 사람이 경영하는 정원이라면 원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전통 공간에 대한 개념어로서 마땅히 쓸만한 용어가 빈곤하다. 한국은 그냥 원림이라고 쓰면 숲을 배경으로 한 자연 영역에 사람의 흔적을 최소한으로 이용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지만, 정작 중국은 원림 앞에 전통 또는 고전이라는 말을 넣어야 한다. 고전 원림, 전통 공간의 원림이라고 말이다. 한국도 원림이라고 그냥쓰지 못하고 있다. 윤국병 등 몇이 한국정원학회를 만들어, 조경과 달리 전통공간의 정원을 표현한 최초의 개념에는 뜰 庭에 나라동산 苑을 사용하여 정원이었다. 우리의 소쇄원이나 보길도 원림 등이 울타리 개념을 넘어선 의미로 여겨졌기에 이를 포함하기 위함이다. 정원 유구 또는 유적으로 존치하는 곳의 자연 환경을 포함시키기 위한 고민이 드러난다.  윤국병, 민경현 등이 작고한 지금은 자연스럽게 한국전통조경이라고 명칭을 쓰고 있다. 물론 학회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한국전통조경학과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학회 논문에는 여전히 원림이니, 정원이니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산만하게 사용하고 있다. 건축을 전공한 분이 한국의 ‘조경’이라는 용어는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를 묻는다. 까짓거 조경이란 용어는 그렇다치고, 전통 공간의 정원,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사대부가 조영하고 경영한 정원에 대한 명칭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전통이라는 말을 꼭 넣어서 나머지 말을 사용한다. 전통 정원, 전통 조경, 전통 원림, 그냥 원림 뭐 이런 식이다. 중국은 고전 원림이라는 말을 쓰는데, 한국은 궁색하게 전통이라는 말로 일률적으로 뒤집어 씌워 사용한다. 전통에 대한 원형도 뚜렷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 정원에 대한 원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이 전통이고 정원일까. 전통에 대한 탐구도 많고, 정원에 대한 탐구도 많으나, 전통 정원에 대한 탐구는 막연히 산발적이다. 이참에 기존에 만들어 궁여지책처럼, 그러나 자리잡아 확고해져가는 전통조경이라는 말로 의견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이 얼마나 기막힌 용어인가. 조경이라는 말을 살리고, 앞에 전통이라는 말만 붙인 건데, 그럴싸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고전조경이라고 하면 더 의미가 볼상사나워진다. 중국은 고전원림이라고 하니 그럴싸하게 여겨지는데 말이다. 일본은 그냥 모든 것을 조원이라는 말 하나도 통용하고 있다. 문화적 수용력과 저변 확대력이 매우 정교하고 인내심이 세심한 국가이다. 일본과 중국은 그러한데, 한국만은 여전히 용어만 가지고도 한 논문 쓸 수 있는 2019년의 현실이다. 내년에도 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용어 지칭만으로 논문이 가능한 국가이니, 이 얼마나 소모적이면서 당면한 사실인가. 누군가 용어를 만들 수는 있으나 누구나 그 용어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이미 기정사실화된 용어도 다시 끄집어 내 논란에 불을 붙인다. 가장 전통조경에 근접한 공간이 조선의 15세기 말 성종대에서 부터 불거진 사림의  등장과 훈구와 갈등에서 시작한 정치적 성패로 갈라지는 흥망성쇠에 따라 소외와 은일의 사대부 발생에서 누정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사화, 붕당/환국/탕평/세도 정치로 이어지는 사이에 임진/정묘/병자의 전쟁, 근대에 들어와 양요와 군란과 정변, 동학혁명, 을미와 을사의 의병까지 드라마틱한 시절에 누정 문화가 꽃피었다는 것이 한국 전통 조경의 가장 큰 특징이다. 동인이 이러한 정치적 흐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와 은일의 사대부의 발생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 당시의 조선 사대부의 유전자에 각인된 문화적 지식적 사상과 철학적 바탕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출처관이 또한 유교에서 비롯된 고집 센, 완고하여 비길 바가 없는 그야말로 유교 경전의 출처가 확실한 근거로 되어 있는, 출처관이라는 것이다. 진퇴양난이 아니라, 진퇴명료라는 것이다. 진퇴가 명료한 조선의 사대부는 벼슬에 나아가서 경화세족으로 지낼 때에도 집 주변 후원 등을 가꾸면서 자연을 끌어들여 거기서 사유의 전유를 누렸으며, 더 나아가 경도 주변 산과 계곡에서 시사를 운영하고 원림을 조성하여 경영하였다. 처음부터 나아가지 않은 사대부는 아예 지방 토호로서 원림을 경영하는 것은 기본 갖춤이었다. 나아갔다 물러나는 사대부는 아예 서서히 혹은 본가가 있는 세력과 경제력으로 원림을 조성하고 경영하였다. 욕심이 지나쳐서 조선왕조실록에까지 원림 경영의 화려함을 경계하라는 상소문이 올라간다. 숙종 때 윤취상의 원림, 경종 때 목호룡의 원림, 경종 때 김창업의 원림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대표적인 상소의 대상이 되는 욕심의 원림이라고 하겠다. 이밖에도 세종 때 조대림의 집 원림에 표범이 출범한 것과 성종 때 왕자의 원림을 위하여 공부하는 곳인 학궁의 땅을 빼앗으려 한 일, 철종 때 맑고 청빈한 원림을 경영하여 칭찬을 받은 김병주의 원림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하나같이 원림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기록된 고전작품이 많다. 아무튼 원림은 중국에서 선점한 용어이니, 굳이 원림이라 쓸 필요는 없겠다. 전통조경이라는 말로 산업적 견지에서 사용하고, 전통공간조성 또는 전통정원, 전통원림…그냥 원림..아아 너무 산만하다. 결국 전통 공간이라고 에둘러 말하고, 굳이 표현한다면 전통조경이라고 해야 할 이다. 정원도 그냥 정원이라 할 수 없고 전통이 붙은 전통정원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조선 후기 누정 원림을 일반적으로 전통조경의 원형이라고 다뤄지고 있다면, 그 시절에 와서야 한국의 특징적인 정원 문화가 자리잡 은 게 분명하면 누정을 중심으로 정원을 부각시켜야 하는데, 누정 문화에서 가장 출현 빈도가 높은 미학적 행위는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서 가치 있게 노는 게 풍류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풍류정원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누정 원림, 풍류 정원, 여전히 난감하다. 그러니 다시 전통조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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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노니는 곳-풍류처

Posted by on 6월 25, 2019 in 조경문화콘텐츠::나무와함께:: | 0 comments

풍류, 잘 노는 것이다. 놀되 형이상학적 쓰임새를 지닌 것이다. 풍류,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노닐 수 있는 마음을 열어 두는 것이다. 경치가 좋은 곳, 풍광이 아스라한 곳, 그 지나간 세월이 아름다운 곳, 속박 없는 무한의 세계이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좋은 친구와 뭐를 못하겠는가. 이게 풍류다. 할 수 없는 게 없는 경지에 도달한 풍광에 놓이는 것이 풍류의 실체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본질을 꺼내도 흔쾌해지는 그 순간이 풍류이다. 울고 싶은 감동에 꺼이꺼이 울어도 된다. 웃고 싶을 때 웃고, 파안대소할 일에 큰 소리로 너스레를 떨어도 된다. 사소한 일에 흥분하고, 친구의 속내에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은 쳐다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런 게 아닌 것을 요구하지마.”가 아니라, 내 안 깊은 곳의 잠재된 의식까지도 끄집어 내 탈탈 털어낼 수 있는 자리가 풍류의 자리이다. 풍류는 함께 하는 것이다. 서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이다. 물론 혼자의 풍류도 운치는 있다. 그러나 열린 공간에서 열린 마음을 나누는 풍류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함께 같은 곳을 쳐다보는 친구인 것이다. 친구가 있다면 풍류도 있다. 풍류는 친구에게서 발현된다. 좋은 친구와 함께 경치 좋은 곳에서 노닌다면 그것은 풍류이다. 오늘 하루 나이를 떠나 속깊은 친구를 찾기 위해 헌신하여야 한다. 오늘만 더 끄적대면 일 하나 마친다. 그러면 내일은 마감하고, 마감의 느낌을 만끽한다. 그러면 풍류의 첫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이천십구년 유월 스무닷새날, 月白이 ‘달집’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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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는 괴짜다.

Posted by on 4월 12, 2019 in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한국도로공사전주수목원에는 창의적 사고로 가득찬 괴짜가 하나 있다. 내가 보고 판단하기에 정년까지 이곳에서 책임자로 근무하게 한다면 공공수목원의 神話가 탄생할 것이다. 그러니 아깝고 아쉬운 게다. 그놈의 인사원칙이 무어며? 가족이나 살림이 무어란 말이냐. 국가가 조직이 활짝 開花될 人物을 지켜내지 못함이 존재의 微力함을 울리는도다. 슬프도다. 기어이 뻔한 사실 하나 直視하여 지켜내지 못함이로다.
-이천십구년 사월 열이튿날, 月白 달집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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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지혜의 공간

Posted by on 4월 12, 2019 in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정원가는 지혜로 정원을 조영한다. 그 배경이 지닌 가치관과 철학적 사유의 원천을 따지지 않더라도, ‘생활 속에서 꽉 찬’, ‘사람이라는 영물’이 지닌 지혜의 총합으로 정원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정원을 만들 수 있고, 모두가 정원기술자이다. 기술이라는 것, 기술자라는 것은 곧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실천력을 갖춘 사람, 또는 그들로 뭉쳐진 조직의 문파를 말한다.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손과 발을 움직여 뭔가를 옮기고 자리잡게 하고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작은 시도이다. 그 사람의 인식의 바탕에서 손과 발, 온 몸이 움직여 시도되는 과정에 기술자의 특성을 구비한다. 그러니 몸을 사용할 수 있는 누구나가 정원기술자이고 생각과 궁리가 있는 기술자의 조직과 문파에 있는 모두가 정원기술자인 것이다. 생각과 궁리의 정수가 정원을 만드는 일에 투영된다.  그걸 지혜로움이라고 부른다. 지혜야말로 정원을 조영하는 일의 압축된 키워드이자 전부인 셈이다. 의경도, 풍류도 아닌, 지혜에 내가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다.  조선의 유학이 정원을 만드는 동인이라면, 우주를 바라보는 자연관이 과정이고, 궁극적인 결과를 내는 지향점이 신선처럼 불로장생 꿈이거나, 도교적 자연관인 무의 세계일 것이다. (2019. 4. 12. 전주수목원 답사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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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庭苑家이다.

Posted by on 3월 26, 2019 in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시가 있는 정원이 한국 정원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다.

역사적 기록만으로 보아도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통틀어 면면히 흐르는 것이 시를 통한 풍경, 즉, 시경의 경지이다.

시를 읊는 것이 사대부의 글쓰기이고, 수양이고 출처관의 또 다른 표현일진데, 매일 풍경을 찾아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계절이 녹아 있는 세밀한 묘사의 정원이 필요한 것이다.

사계절이 있고, 계절마다의 세부적인 묘사가 시공을 초월하여 이어졌다.

정태와 동태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

전통 정원은 사대부의 정원과 민중의 정원이 다를 바가 없다. 사대부의 정원이 시를 통한 경관의 완성이라면, 매우 추상적이면서 동아시아 관념, 주로 중국의 유교관이 투영된 것이고, 민중은 일상의 노동과 휴식에서 세월을 느끼고 정념을 대상화하는 그들만의 사고와 실천으로 최소한의 멋내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또한 사대부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관념적으로 얻어 들은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박하다. 감추었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다. 그냥 쓱 볼 때와 자세히 들여다 볼 때가 다르다.  정원가는 모두 보이는 게 아니라 덜 보이게 한다. 덜 보이게 하는 기법은 의미의 부여이다. 곧 의경의 발현이다. 왜 그러했는지를, 허술하고 비우고 어리숙해 보이게 했는가는 정원가인 조영자의 의미 부여에 기대야 할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다. 봉황의 뜻을 알아야 하고, 이황의 졸박의 형태는 어떠했을까를 상상하여야 한다. 내 관념의 졸박이 정원에 어떻게 실천으로 반영될 것인가를 한 번쯤은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런 그 시대적 인물과 사회와 사상과 출처관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옛 정원에 대한 다가섬은 한없이 겉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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