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K-Gardener 양성 프로그램 개발 및 협동조합 및 사회적 기업

보이지 않는 들판

Posted by on 2월 10, 2019 in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내 스스로는 알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놓치고 슬금슬금 침묵하는 것이 남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햇살이 내리 쬐다가 금방 사라지는 입춘 전후의 사정이란 대개 그렇다. 새로운 기운으로 우주가 술렁이는 게 분명하다. 대체 왜 이리 어수선한가. 여행과 새로움과 기쁨과 들뜸이 소란하다. 잠깐이라도 왁자지껄 흐뭇하면 그만이다.

저 들판은 오늘도 겨울이다. 말이 없듯이 풍경도 고만하다. 속은 뜨거운데, 겨울 나는 동안 입을 다문 정황이 노골적이다. 들판에서 쏘아대는 기운에 잠시 노곤함을 잊는다. 근데, 이것도 아니다. 삶의 습성이 강약의 리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서 놀란다. 살아가는 데 조금도 도움되지 않는 게 일관적인 습성이다. 사람은 일관적으로 사는 게 죄악이다. 수시로 절기만큼은 변해야 한다. 어째 수도 없이 아름다운 세상을 그저 그렇다고 일관하여야 할까. 

슬플 때는 슬퍼야 하고, 신날 때는 신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옭아 맨 채, 조심조심 살얼음 걷듯 채질한다. 봄바람이 불면 그래서 외면하고, 비가 오면 그래서 피한다. 단풍이 들면 어느새 하다가 겨울 맞이한다. 겨울이어서 감출 수 있는 게 많다. 저장하는 시기라 그러할 것이다. 슬쩍슬쩍 노래 부르며 어느 특정한 한 때와 나이를 버리고자 한다. 이렇게 고요할 수가 없다. 금강이 부여를 만나 백마강의 이름을 얻었다고, 그 이름으로 덧씌워 흐른다고, 나 또한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남쪽의 매화 소식을 손으로 꼽으며 수원의 와룡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골짜기 깊은 한 시절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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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공감하는 글 모심

Posted by on 12월 4, 2018 in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송석호

8분 · 

본인은 근래에 보여지는 ‘정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증대를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깊다. 학문과 사회의 이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학계를 구심점으로 관공서와 업계활동이 순조로워야 하는데, 현 시점에서 ‘정원’이라는 용어자체가 관공서와 업계가 중심이 되어 현대정원의 모습과 흐름을 주도하고 있고 학계의 역량은 미미한 느낌이다. 이렇게되면 국가정원법과 같은 시행착오가 계속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학계가 미치는 역량이 부족하다보니 한국정원에 대한 질서와 정의가 혼미해 이에 대한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지금의 정원의 모습을 범 세계적 흐름에 호응하는 ’21세기 한국정원’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불과 100년전에도 이어오던 전통정원의 본질과는 이질감이 커서 본인은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다. 이는 정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시대사조, 종교, 국민성, 자연환경중에 시대사조가 바뀌었기 때문으로, 세계적인 이념이 동일시 되기에 정원의 형태나 이상향도 유사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랜 기간동안 계승되어온 전통정원은 현대정원과 본질적으로 융화되지 못하고 단절된 형태로 과거의 모습 그대로 모방하여 찍어내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순천만, 세종시 등등). 이 또한 학계의 영향력 부재라고 꼬집고 싶다.

한국전통정원이 아름다운 이유, 혹은 특징을 ‘가꾸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는 시각적 접근을 통한 과정이 만들어낸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의 정원이 심미적, 미학적, 생태적 등의 시각적인 요인을 중요시한다면 전통정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과 같아 철학적 요인을 중요시 해왔다. 정원의 궁극은 플라토닉처럼 정신으로 진화한다. 진화해온 전통정원의 본질을 조금만 더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 이어갔으면 하는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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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는 어떻게 자유와 만나는가

Posted by on 11월 22, 2018 in 휴림산방,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버려진 자전거는 어떻게 그 자유를 얻었을까”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은 1974년에 출간된 책이다. 네루다가 1973년 9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70 노인의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온갖 물음을 300개 넘게 던졌다. 버려진 자전거에서 비로소 자전거의 자유를 발견하였다는 구절에서 나 또한 안도한다. 내 유배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게 뭔가. 어디에 소용되는 건가. 내게 필요했던 것이었던가. 부자유스러웠던 건 또 어떤 게 있었다는 건가. 충분히 부자유스러움과 맞서서 세상을 살아왔던 게 아닌가. 그래서 많은 것을 버린 것 아닌가. 속하다, 속하다. 속한 것에 스며드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 부적응이라고 했다가 아니야, 부자유스러움은 모두 떨치자 했던 것 아닌가.

지금은 자유가 곧 침묵인 상태에 놓였다. 침묵이라기보다는 칩거일 것이다.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 줄고, 혼자 중얼대다 만다. 힘들다. 체질적으로 분주했던 생활에서 저만치 물러나 있다. 스스로 선택해서 귀한 근거를 만들어 찾아든 유배이다. 힘드니까 친구가 보인다. 먼 친구가 많았구나. 어려울 때 친구가 보인다더니 꼭 그렇다. 가족도, 동료도 마찬가지이다. 고난은 사람을 가려내는 힘을 지녔다. 시린 한 편을 따스하게 덥히려 노래를 듣는다. 새벽부터 스멀대며 벽을 타고 넘어오는 세탁기 돌리는 소리는 이제 좀 참을만하다. 존재의 근거를 어느 정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에서 이해가 되면서 그 소리의 데시벨은 낮아졌다. 꽉 막힌 생각은 불통이다. 유연한 사고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세탁기 소리에 맞서는 음악을 유튜브에서 틀었다. Leonard Cohen이다. 그의 동굴 속 깊은 심연의 고독이 이 아침에 잘 어울린다. 어디 세탁기 소리가 범접이나 하겠는가. 저 주문처럼 번지는 아득함이 좋다.

나 또한 볼륨이 클 줄 몰라 15% 크기로 낮춘다. 혼자 듣기에 딱 좋은 크기이다. 그냥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곳의 생활은 잿빛 짙은 가라앉음이다. 겸손한 것일까. 겸손한 척하려는 것일까. 하기사 분노가 좋을 리는 없다. 문제는 내 자존에 관한 진행일 것이다. 좀 더 두고 보자는 심보일 것이다. 당당하다는 것은 되도록 비굴하고 조잡한 일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시선을 멀리 두는 것이다. 원대함까지는 아니지만 가슴에 서늘한 뜻을 의미 있게 세운다. 자꾸 되뇐다. 그래서 그 끝은 어디인가를 묻는다. 여주와 수원의 제자를 묶어서 밴드를 만들었다. 내 의도는 모두들 친구이고, 내가 엮어서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옛 제자를 위하여 명예의 전당 밴드를 추가하였다. 내가 현역에서 못한, 마지막 현역 직무를 수행한 것이다. 과연 이들은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두고 볼 참이다. 잘되기를 바라고, 잘 되었을 때 기쁘고, 도울 수 있을 때 즐겁게 다가서는 그런 존재로서 서로에게 친구가 되라는 덕담이다. 기분 좋은 날, 가령 1년에 1번 정도 만나 곡주라도 나누면서 격의 없이, 나를 포함한 모두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는 자리를 펼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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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잠시 스치는 광경이 오래 남는다

Posted by on 7월 22, 2016 in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잠시 스치는 광경이 오래 남는 경우가 꽤 있다. 아이들의 순간 표정과 언행도 늘 같지 않기에 다시 살피게 되는 이치이다. 좋은 풍경 속 아름다운 시간만 보아도 세월이 부족할 것 같다 하지만, 잠시 스치는 것에서 머물게 되는 시간 또한 귀하다. 쉽게 떠나지 않는 것은 그럴만한 사유의 힘을 지녔다. 잠시 광경은 그 자신만 가지고 있는 존재의 심연을 지녔다. 그것이 풀리거나 가지고 있는 사유를 잃게 되면 휘발되어 잠시 광경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잠시 광경으로서의 통과 의례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뭔가를 시작하고 마치는 데에 찍고 접는 일은 소소하게라도 있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자발적 접고 펴는 일이다. 멍석을 깔고 여름 밤하늘의 별이라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장하고 의연했다. 소양천 천변을 스치면서 과연 이 순간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자문자답하였다. 벌써 세 학기가 지났다. 과만대락瓜滿帶落이라는 말이 있다. 외가 익으면 저절로 꼭지가 떨어진다는 말이다. 저절로 떨어진다는데 내 과만도 꽤 멀리 왔다. 익을대로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겠지 한 것이 그나마 두 발을 굳건하게 했나보다.

모두 잠시 스치는 것들에 대한 사유를 놓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떠오르는 것과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요즘 잠시 광경으로 떠나지 않고 나를 붙들어 매는 말 중에 ‘데면데면하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저기서 그 ‘데면데면한’ 상황에 봉착하기도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이말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친밀감이 없이 예사롭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무뚝뚝하다는 말과도 통하는데 어감은 둘이 매우 다르다. 아무튼 상냥하지 않은 태도다. 가끔 집밥 뷔페를 들린다. 인사를 하여도 돈을 내고 나와도 데면데면한 주인을 보면서 궁금해진다.  데면데면하게 살아가는 저 무딘 정서에 대하여 궁금해진다. 세상을 다 알아 별로 더 알고 싶지 않은 듯한 자세처럼 처신한다.

어제는 모두 떠난 텅 빈 듯한 교정에서 두리번 대다가 빛나는 광경에 목이 매였다. ‘나무수국’이 곧 벌어지려고, 터지려고 잔뜩 움추리고 있었다. 아이쿠, 눈물이 터져 나올 듯 대견했다. 작년에는 누군가 밑에서 바짝 잘라 삽목하기 위해 가져갔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짧게 남기고 잘라가서 가지들이 도장하여 꽃이 피면 쓰러지고 해서 묶어두곤 하였는데, 올해 적당히 자르고 남겼으니 그 실한 꽃눈의 터지기 직전의 색감이라는 게 마치 새로 만든 웨딩드레스에서 느껴지는 착한 순수함이 떼로 매달려 있다. 정말 기막힌 잠시 광경이다. 천변 풍경과 집밥 뷔페의 잠시 광경을 넘어서는 찬란하여 데면데면해지는 나무수국의 찰라적 풍경이리라.

오늘 다시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데면데면한 집밥 뷔페로 나서는 통과의례 앞에 설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여유로운 아침이다.
데면데면 풍경

데면데면 풍경

천변 풍경

천변 풍경

양묘장 관수풍경

양묘장 관수풍경

찬란한 나무수국 풍경

찬란한 나무수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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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조경교실은 나를 치유한다

Posted by on 11월 16, 2013 in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005. 조경교실은 나를 치유한다. / 온형근

 

 

올해 조경교실은 현상 유지다.

올해는 4기의 활동이 중심이 되는 조경교실이다. 작년 3기의 화려한 활동에 비하면 착 가라앉은 느낌이다. 4기가 졸업하는 즈음에 보면 모두 작년 선배들의 활동에 힘입어 거저 성과를 올렸다. 경기정원박람회 대상을 거머쥐고 나서 당사자였던 3기들보다 4기가 무임승차처럼 이번에 대학 조경과에 모두 노미네이트되었다. 4기는 작년 선배들 따라가기에만 급급했었다. 자기 자신들을 여유있게 돌아보며 후배를 챙기지 않았다. 5기 후배들 챙기는 몫은 5기들 스스로의 몫이었다. 그런데 5기는 모두 자기 자신의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았다.

 

요즘 조경교실은 복원 중이다.

경기도 FFK 전진대회 조경설계 참가자들의 성과물을 가지고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모든 게 우리 방식이다. 재해석하고 분석하면서 표현 방법을 ‘조경교실_ON’의 독특한 진행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각 참가자들의 설계 계획서를 최대한 받아 들인다. 그리고 개념도와 평면도, 단면도에서 당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런 복원 작업은 당신을 여유롭게 하는 좋은 기회다. 물론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6기 몇 명은 당혹스럽겠지만, 지금 이 작업에 동참하고 있는 당신들은 나름 여유로운 활기를 가진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애라고 한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동서고금의 고전 모두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삶의 화두다.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을 배려할 수 없다. 내가 중심이다. 당신은 당신이 세상의 중심인가. 당신의 모든 생각은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곧 진행이 되고 그것은 곧이어 아웃풋, 즉 생산품이 나오는 것이다. 매일 조경교실에서 생산을 하고 생산물을 주워 담고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그게 완벽하게 반복되어야 여유가 생기고 남을 배려할 수 있다. 배려가 없는 자기 사랑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친구들은 어떠한가.

당신이 조경교실에서 방과 후 매일, 토, 일요일, 여름방학, 겨울방학, 봄방학을 보내는 그 시간을 생각하라. 당신의 친구가 보내는 시간과 비교하라. 그들은 수다떨기에 바쁘다. 그들은 잘 놀지도 못하면서 논다고 한다. 그냥 시간을 보내는 일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어떤가. 지금 당장 좀이 쑤시고 친구를 따라 수다와 놀기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하지만, 변해가고 있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어떻게 변하고 있지? 마음의 문을 직업으로서의 조경 전문가 쪽으로 열고 있다. 이런 저런 수많은 생각들을 꼭 붙잡아 매고 도전 의식 충만한 자신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당신 자신 찾기’는 수행이다.

수행은 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일상에서 수행을 한다고 보면 된다. 조경교실에서 당신은 수행 중이다. 수행이란 그렇다. 즐거움, 힘듬, 게으름, 슬픔, 놀라움 등의 변화무쌍한 심성의 굴곡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일이다. 조경교실에서 손으로 설계를 하면서 만나는 것들은 선과 면과 수목의 표현과 시설물의 표현 등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매일 선과 만나는 일이다. 선을 긋는 마음은 어때야 하는가. 마음을 평정하게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도면을 그릴 때,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당신은 지금 여행 중이다.

수없이 말했지만, 17-19살 사이의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중이다. 여행 중에 만나는 많은 것이 다 살이 되고 피가 되어 평생의 세포로 거듭 되새김질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여행이 얼마나 소중한가. 마음을 열어야 한다. 5기가 이제 겨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조경교실에서 치유도 발견할 수 없고, 수행도 이룰 수 없다. 조경교실은 당신의 반려다.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거의 전부다. 이 여행에서 당신은 수행으로 실천하며 자신의 마인드를 유지하여 치유되고 배려를 배운다. 그것이 조경교실에서의 반복 훈련이다. 지금하고 있는 복원 작업과 이어지는 전국 작품 복원 작업도 당신에게 여유와 반복 훈련의 좋은 치유 요소가 될 것이다. 도전하라.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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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산다

Posted by on 11월 16, 2013 in 전통원림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004.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산다 / 온형근

 

 

모바일은 일상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것은 부모 자식보다 모바일이다. 눈 뜨면서 확인하고 잠을 자기 전에 다시 본다. 보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탐구와 함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가장 잘나가는 게임기이기도 하다. 손에, 주머니에 가방에 있고, 회의에 화장실에 여행에 함께 한다. 이러니 가히 내가 가진 이름보다 더 잘 불리운다.

 

나를 불러줄 때 이름을 부른다.

당신을 호출할 때는 당신의 전화번호를 통하지만 반드시 이름을 확인한다. 전화를 잘못 누를 수도 있고, 선택을 잠시 그릇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목소리를 먼저 듣고 이름을 확인하는 게 보통이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사방에 걸고 살고 있는 것이다. 고유식별 번호인 주민번호와 함께 전화번호,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 등으로 일컫는 많은 식별 요소보다 당신의 이름은 소중하다.

 

이름은 인격이다.

이름은 브랜드다. 당신을 대표하는 특성이다. 당신이 하는 행동과 태도와 모든 감성의 표현도 당신의 이름을 걸고 이루어진다. 인류가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정체성이다. 스스로에 대한 탐구와 이에 대한 반성, 그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위한 발전이 이름을 걸고 이루어진다. 조경교실에서 당신은 조경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출발했다. 이는 당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름값은 브랜드 가치다.

사람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브랜드 가치는 당신의 이름과 함께 만들어진다.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당신을 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놓치지 마라. 항상 조경교실에서 생활하는 당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마라. 그게 동료일지, 선배일지, 후배일지 따지지 마라. 누가 인격으로 존경받고 외면받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결정되고 있다. 당신의 조경 전문가적 브랜드가치는 이미 지금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은 기억이고 기록이다.

조경교실에서 생활한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은 기억이고 기록이다. 당신이 쉼없이 달려오면 그렸던 도면 역시 우리들에게는 기억이고 기록이다.  이런 기억과 기록이 아름다울수록 당신의 브랜드 가치는 커진다. 지금의 차이는 미약하지만 세월이 지나 전문가의 길을 걷고 있을 때쯤이면 이런 기억과 기록들은 그대로 당신의 세포가 되고 피부가 되어 반짝거리거나 쭈그러있거나 할 것이다.

 

이름처럼 뚜렷한 것은 없다.

뚜렷하다는 것은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경교실에서 설계를 한다는 것은 선긋기를 비롯한 많은 부분의 일관성이 서로 개성있게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법이 아니라 당신이 생각하는 것의 일관성이다. 어제와 오늘이 변함없을 때,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갖춰지게 된다. 수시로 변덕을 부리고, 어제와 오늘이 갑자기 다른 것은 배우는 입장에서 가장 좋지 않은 버릇이다. 고쳐야 한다. 아주 확실하게 뜯어내야 한다. 도면만 보아도 당신의 인격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당신의 이름이 가장 오래 남는 브랜드라는 믿음이 있다. 

 

인간됨은 이름과 함께 평생 함께 산다.

조경교실에서 공동 생활하는 것은 당신의 인간됨이 함께 공유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조경은 팀작업을 많이 한다. 그러니 혼자 뭔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말아야 한다. 일을 분류하여 나누고 서로 잘하는 부분을 격려해주고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여 큰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전문 분야가 조경이다. 조경 전문가가 되려는 당신은 이제 단체생활에서 어떤 인간됨을 성장시켜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최소한 고민은 아니더라도 심각하게 지금 당신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당신의 이름을 걸고 조경교실 활동을 하고 있는가를 매일 평가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에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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