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K-Gardener 양성 프로그램 개발 및 협동조합 및 사회적 기업

진짜는 괴짜다.

Posted by on 4월 12, 2019 in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한국도로공사전주수목원에는 창의적 사고로 가득찬 괴짜가 하나 있다. 내가 보고 판단하기에 정년까지 이곳에서 책임자로 근무하게 한다면 공공수목원의 神話가 탄생할 것이다. 그러니 아깝고 아쉬운 게다. 그놈의 인사원칙이 무어며? 가족이나 살림이 무어란 말이냐. 국가가 조직이 활짝 開花될 人物을 지켜내지 못함이 존재의 微力함을 울리는도다. 슬프도다. 기어이 뻔한 사실 하나 直視하여 지켜내지 못함이로다.
-이천십구년 사월 열이튿날, 月白 달집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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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지혜의 공간

Posted by on 4월 12, 2019 in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정원가는 지혜로 정원을 조영한다. 그 배경이 지닌 가치관과 철학적 사유의 원천을 따지지 않더라도, ‘생활 속에서 꽉 찬’, ‘사람이라는 영물’이 지닌 지혜의 총합으로 정원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정원을 만들 수 있고, 모두가 정원기술자이다. 기술이라는 것, 기술자라는 것은 곧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실천력을 갖춘 사람, 또는 그들로 뭉쳐진 조직의 문파를 말한다.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손과 발을 움직여 뭔가를 옮기고 자리잡게 하고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작은 시도이다. 그 사람의 인식의 바탕에서 손과 발, 온 몸이 움직여 시도되는 과정에 기술자의 특성을 구비한다. 그러니 몸을 사용할 수 있는 누구나가 정원기술자이고 생각과 궁리가 있는 기술자의 조직과 문파에 있는 모두가 정원기술자인 것이다. 생각과 궁리의 정수가 정원을 만드는 일에 투영된다.  그걸 지혜로움이라고 부른다. 지혜야말로 정원을 조영하는 일의 압축된 키워드이자 전부인 셈이다. 의경도, 풍류도 아닌, 지혜에 내가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다.  조선의 유학이 정원을 만드는 동인이라면, 우주를 바라보는 자연관이 과정이고, 궁극적인 결과를 내는 지향점이 신선처럼 불로장생 꿈이거나, 도교적 자연관인 무의 세계일 것이다. (2019. 4. 12. 전주수목원 답사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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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庭苑家이다.

Posted by on 3월 26, 2019 in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시가 있는 정원이 한국 정원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다.

역사적 기록만으로 보아도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통틀어 면면히 흐르는 것이 시를 통한 풍경, 즉, 시경의 경지이다.

시를 읊는 것이 사대부의 글쓰기이고, 수양이고 출처관의 또 다른 표현일진데, 매일 풍경을 찾아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계절이 녹아 있는 세밀한 묘사의 정원이 필요한 것이다.

사계절이 있고, 계절마다의 세부적인 묘사가 시공을 초월하여 이어졌다.

정태와 동태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

전통 정원은 사대부의 정원과 민중의 정원이 다를 바가 없다. 사대부의 정원이 시를 통한 경관의 완성이라면, 매우 추상적이면서 동아시아 관념, 주로 중국의 유교관이 투영된 것이고, 민중은 일상의 노동과 휴식에서 세월을 느끼고 정념을 대상화하는 그들만의 사고와 실천으로 최소한의 멋내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또한 사대부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관념적으로 얻어 들은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박하다. 감추었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다. 그냥 쓱 볼 때와 자세히 들여다 볼 때가 다르다.  정원가는 모두 보이는 게 아니라 덜 보이게 한다. 덜 보이게 하는 기법은 의미의 부여이다. 곧 의경의 발현이다. 왜 그러했는지를, 허술하고 비우고 어리숙해 보이게 했는가는 정원가인 조영자의 의미 부여에 기대야 할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다. 봉황의 뜻을 알아야 하고, 이황의 졸박의 형태는 어떠했을까를 상상하여야 한다. 내 관념의 졸박이 정원에 어떻게 실천으로 반영될 것인가를 한 번쯤은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런 그 시대적 인물과 사회와 사상과 출처관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옛 정원에 대한 다가섬은 한없이 겉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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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들판

Posted by on 2월 10, 2019 in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내 스스로는 알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놓치고 슬금슬금 침묵하는 것이 남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햇살이 내리 쬐다가 금방 사라지는 입춘 전후의 사정이란 대개 그렇다. 새로운 기운으로 우주가 술렁이는 게 분명하다. 대체 왜 이리 어수선한가. 여행과 새로움과 기쁨과 들뜸이 소란하다. 잠깐이라도 왁자지껄 흐뭇하면 그만이다.

저 들판은 오늘도 겨울이다. 말이 없듯이 풍경도 고만하다. 속은 뜨거운데, 겨울 나는 동안 입을 다문 정황이 노골적이다. 들판에서 쏘아대는 기운에 잠시 노곤함을 잊는다. 근데, 이것도 아니다. 삶의 습성이 강약의 리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서 놀란다. 살아가는 데 조금도 도움되지 않는 게 일관적인 습성이다. 사람은 일관적으로 사는 게 죄악이다. 수시로 절기만큼은 변해야 한다. 어째 수도 없이 아름다운 세상을 그저 그렇다고 일관하여야 할까. 

슬플 때는 슬퍼야 하고, 신날 때는 신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옭아 맨 채, 조심조심 살얼음 걷듯 채질한다. 봄바람이 불면 그래서 외면하고, 비가 오면 그래서 피한다. 단풍이 들면 어느새 하다가 겨울 맞이한다. 겨울이어서 감출 수 있는 게 많다. 저장하는 시기라 그러할 것이다. 슬쩍슬쩍 노래 부르며 어느 특정한 한 때와 나이를 버리고자 한다. 이렇게 고요할 수가 없다. 금강이 부여를 만나 백마강의 이름을 얻었다고, 그 이름으로 덧씌워 흐른다고, 나 또한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남쪽의 매화 소식을 손으로 꼽으며 수원의 와룡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골짜기 깊은 한 시절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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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공감하는 글 모심

Posted by on 12월 4, 2018 in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송석호

8분 · 

본인은 근래에 보여지는 ‘정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증대를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깊다. 학문과 사회의 이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학계를 구심점으로 관공서와 업계활동이 순조로워야 하는데, 현 시점에서 ‘정원’이라는 용어자체가 관공서와 업계가 중심이 되어 현대정원의 모습과 흐름을 주도하고 있고 학계의 역량은 미미한 느낌이다. 이렇게되면 국가정원법과 같은 시행착오가 계속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학계가 미치는 역량이 부족하다보니 한국정원에 대한 질서와 정의가 혼미해 이에 대한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지금의 정원의 모습을 범 세계적 흐름에 호응하는 ’21세기 한국정원’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불과 100년전에도 이어오던 전통정원의 본질과는 이질감이 커서 본인은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다. 이는 정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시대사조, 종교, 국민성, 자연환경중에 시대사조가 바뀌었기 때문으로, 세계적인 이념이 동일시 되기에 정원의 형태나 이상향도 유사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랜 기간동안 계승되어온 전통정원은 현대정원과 본질적으로 융화되지 못하고 단절된 형태로 과거의 모습 그대로 모방하여 찍어내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순천만, 세종시 등등). 이 또한 학계의 영향력 부재라고 꼬집고 싶다.

한국전통정원이 아름다운 이유, 혹은 특징을 ‘가꾸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는 시각적 접근을 통한 과정이 만들어낸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의 정원이 심미적, 미학적, 생태적 등의 시각적인 요인을 중요시한다면 전통정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과 같아 철학적 요인을 중요시 해왔다. 정원의 궁극은 플라토닉처럼 정신으로 진화한다. 진화해온 전통정원의 본질을 조금만 더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 이어갔으면 하는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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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는 어떻게 자유와 만나는가

Posted by on 11월 22, 2018 in 與言齋::묵상, 전통정원기술자::K-Gardener | 0 comments

“버려진 자전거는 어떻게 그 자유를 얻었을까”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은 1974년에 출간된 책이다. 네루다가 1973년 9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70 노인의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온갖 물음을 300개 넘게 던졌다. 버려진 자전거에서 비로소 자전거의 자유를 발견하였다는 구절에서 나 또한 안도한다. 내 유배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게 뭔가. 어디에 소용되는 건가. 내게 필요했던 것이었던가. 부자유스러웠던 건 또 어떤 게 있었다는 건가. 충분히 부자유스러움과 맞서서 세상을 살아왔던 게 아닌가. 그래서 많은 것을 버린 것 아닌가. 속하다, 속하다. 속한 것에 스며드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 부적응이라고 했다가 아니야, 부자유스러움은 모두 떨치자 했던 것 아닌가.

지금은 자유가 곧 침묵인 상태에 놓였다. 침묵이라기보다는 칩거일 것이다.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 줄고, 혼자 중얼대다 만다. 힘들다. 체질적으로 분주했던 생활에서 저만치 물러나 있다. 스스로 선택해서 귀한 근거를 만들어 찾아든 유배이다. 힘드니까 친구가 보인다. 먼 친구가 많았구나. 어려울 때 친구가 보인다더니 꼭 그렇다. 가족도, 동료도 마찬가지이다. 고난은 사람을 가려내는 힘을 지녔다. 시린 한 편을 따스하게 덥히려 노래를 듣는다. 새벽부터 스멀대며 벽을 타고 넘어오는 세탁기 돌리는 소리는 이제 좀 참을만하다. 존재의 근거를 어느 정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에서 이해가 되면서 그 소리의 데시벨은 낮아졌다. 꽉 막힌 생각은 불통이다. 유연한 사고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세탁기 소리에 맞서는 음악을 유튜브에서 틀었다. Leonard Cohen이다. 그의 동굴 속 깊은 심연의 고독이 이 아침에 잘 어울린다. 어디 세탁기 소리가 범접이나 하겠는가. 저 주문처럼 번지는 아득함이 좋다.

나 또한 볼륨이 클 줄 몰라 15% 크기로 낮춘다. 혼자 듣기에 딱 좋은 크기이다. 그냥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곳의 생활은 잿빛 짙은 가라앉음이다. 겸손한 것일까. 겸손한 척하려는 것일까. 하기사 분노가 좋을 리는 없다. 문제는 내 자존에 관한 진행일 것이다. 좀 더 두고 보자는 심보일 것이다. 당당하다는 것은 되도록 비굴하고 조잡한 일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시선을 멀리 두는 것이다. 원대함까지는 아니지만 가슴에 서늘한 뜻을 의미 있게 세운다. 자꾸 되뇐다. 그래서 그 끝은 어디인가를 묻는다. 여주와 수원의 제자를 묶어서 밴드를 만들었다. 내 의도는 모두들 친구이고, 내가 엮어서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옛 제자를 위하여 명예의 전당 밴드를 추가하였다. 내가 현역에서 못한, 마지막 현역 직무를 수행한 것이다. 과연 이들은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두고 볼 참이다. 잘되기를 바라고, 잘 되었을 때 기쁘고, 도울 수 있을 때 즐겁게 다가서는 그런 존재로서 서로에게 친구가 되라는 덕담이다. 기분 좋은 날, 가령 1년에 1번 정도 만나 곡주라도 나누면서 격의 없이, 나를 포함한 모두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는 자리를 펼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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