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문화콘텐츠::나무와함께::

조경은 문화다. 콘텐츠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집필::동아시아 공간 예술 미학-논문 작성 및 서재, 출판

전통 조경인가, 전통 정원인가

Posted by on 6월 26, 2019 in 조경문화콘텐츠::나무와함께:: | 0 comments

자연이란 숲이다. 숲에서는 모든 게 제 몫만큼 영역을 확보하여 아주 효율적인 생을 도모한다. 숲의 질서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과 다르다. 숲을 베어내고 사람이 자본의 논리에 경제적으로 모여 살며 도시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도시 근교나 산악을 포함한 자연은 변함없이 옛 그대로의 생명의 순리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만 편리함을 추구하는 잇속에 따라 도시의 편익시설과 이로움을 만끽할 뿐이다. 그래도 또 주말이면 자연으로, 숲으로 떠나지 않는가. 산과 계곡이 있는 생명의 원천에 잠깐 머물며 긴 사유를 할 수 있는 명상의 순간이 원림에 있다. 원림이라고 말하면 동아시아 삼국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개념이 내재되어 소통이 가능한 용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조경, 조원, 원림이라는 삼국의 전문 산업 영역으로 개념을 이어가면 느낌이 또 다르다. 전통 공간에서의 정원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가. 이러한 산업 영역으로서 지칭되는 용어가 아니라, 숲을 배경으로 하여 사람이 경영하는 정원이라면 원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전통 공간에 대한 개념어로서 마땅히 쓸만한 용어가 빈곤하다. 한국은 그냥 원림이라고 쓰면 숲을 배경으로 한 자연 영역에 사람의 흔적을 최소한으로 이용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지만, 정작 중국은 원림 앞에 전통 또는 고전이라는 말을 넣어야 한다. 고전 원림, 전통 공간의 원림이라고 말이다. 한국도 원림이라고 그냥쓰지 못하고 있다. 윤국병 등 몇이 한국정원학회를 만들어, 조경과 달리 전통공간의 정원을 표현한 최초의 개념에는 뜰 庭에 나라동산 苑을 사용하여 정원이었다. 우리의 소쇄원이나 보길도 원림 등이 울타리 개념을 넘어선 의미로 여겨졌기에 이를 포함하기 위함이다. 정원 유구 또는 유적으로 존치하는 곳의 자연 환경을 포함시키기 위한 고민이 드러난다.  윤국병, 민경현 등이 작고한 지금은 자연스럽게 한국전통조경이라고 명칭을 쓰고 있다. 물론 학회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한국전통조경학과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학회 논문에는 여전히 원림이니, 정원이니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산만하게 사용하고 있다. 건축을 전공한 분이 한국의 ‘조경’이라는 용어는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를 묻는다. 까짓거 조경이란 용어는 그렇다치고, 전통 공간의 정원,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사대부가 조영하고 경영한 정원에 대한 명칭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전통이라는 말을 꼭 넣어서 나머지 말을 사용한다. 전통 정원, 전통 조경, 전통 원림, 그냥 원림 뭐 이런 식이다. 중국은 고전 원림이라는 말을 쓰는데, 한국은 궁색하게 전통이라는 말로 일률적으로 뒤집어 씌워 사용한다. 전통에 대한 원형도 뚜렷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 정원에 대한 원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이 전통이고 정원일까. 전통에 대한 탐구도 많고, 정원에 대한 탐구도 많으나, 전통 정원에 대한 탐구는 막연히 산발적이다. 이참에 기존에 만들어 궁여지책처럼, 그러나 자리잡아 확고해져가는 전통조경이라는 말로 의견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이 얼마나 기막힌 용어인가. 조경이라는 말을 살리고, 앞에 전통이라는 말만 붙인 건데, 그럴싸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고전조경이라고 하면 더 의미가 볼상사나워진다. 중국은 고전원림이라고 하니 그럴싸하게 여겨지는데 말이다. 일본은 그냥 모든 것을 조원이라는 말 하나도 통용하고 있다. 문화적 수용력과 저변 확대력이 매우 정교하고 인내심이 세심한 국가이다. 일본과 중국은 그러한데, 한국만은 여전히 용어만 가지고도 한 논문 쓸 수 있는 2019년의 현실이다. 내년에도 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용어 지칭만으로 논문이 가능한 국가이니, 이 얼마나 소모적이면서 당면한 사실인가. 누군가 용어를 만들 수는 있으나 누구나 그 용어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이미 기정사실화된 용어도 다시 끄집어 내 논란에 불을 붙인다. 가장 전통조경에 근접한 공간이 조선의 15세기 말 성종대에서 부터 불거진 사림의  등장과 훈구와 갈등에서 시작한 정치적 성패로 갈라지는 흥망성쇠에 따라 소외와 은일의 사대부 발생에서 누정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사화, 붕당/환국/탕평/세도 정치로 이어지는 사이에 임진/정묘/병자의 전쟁, 근대에 들어와 양요와 군란과 정변, 동학혁명, 을미와 을사의 의병까지 드라마틱한 시절에 누정 문화가 꽃피었다는 것이 한국 전통 조경의 가장 큰 특징이다. 동인이 이러한 정치적 흐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와 은일의 사대부의 발생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 당시의 조선 사대부의 유전자에 각인된 문화적 지식적 사상과 철학적 바탕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출처관이 또한 유교에서 비롯된 고집 센, 완고하여 비길 바가 없는 그야말로 유교 경전의 출처가 확실한 근거로 되어 있는, 출처관이라는 것이다. 진퇴양난이 아니라, 진퇴명료라는 것이다. 진퇴가 명료한 조선의 사대부는 벼슬에 나아가서 경화세족으로 지낼 때에도 집 주변 후원 등을 가꾸면서 자연을 끌어들여 거기서 사유의 전유를 누렸으며, 더 나아가 경도 주변 산과 계곡에서 시사를 운영하고 원림을 조성하여 경영하였다. 처음부터 나아가지 않은 사대부는 아예 지방 토호로서 원림을 경영하는 것은 기본 갖춤이었다. 나아갔다 물러나는 사대부는 아예 서서히 혹은 본가가 있는 세력과 경제력으로 원림을 조성하고 경영하였다. 욕심이 지나쳐서 조선왕조실록에까지 원림 경영의 화려함을 경계하라는 상소문이 올라간다. 숙종 때 윤취상의 원림, 경종 때 목호룡의 원림, 경종 때 김창업의 원림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대표적인 상소의 대상이 되는 욕심의 원림이라고 하겠다. 이밖에도 세종 때 조대림의 집 원림에 표범이 출범한 것과 성종 때 왕자의 원림을 위하여 공부하는 곳인 학궁의 땅을 빼앗으려 한 일, 철종 때 맑고 청빈한 원림을 경영하여 칭찬을 받은 김병주의 원림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하나같이 원림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기록된 고전작품이 많다. 아무튼 원림은 중국에서 선점한 용어이니, 굳이 원림이라 쓸 필요는 없겠다. 전통조경이라는 말로 산업적 견지에서 사용하고, 전통공간조성 또는 전통정원, 전통원림…그냥 원림..아아 너무 산만하다. 결국 전통 공간이라고 에둘러 말하고, 굳이 표현한다면 전통조경이라고 해야 할 이다. 정원도 그냥 정원이라 할 수 없고 전통이 붙은 전통정원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조선 후기 누정 원림을 일반적으로 전통조경의 원형이라고 다뤄지고 있다면, 그 시절에 와서야 한국의 특징적인 정원 문화가 자리잡 은 게 분명하면 누정을 중심으로 정원을 부각시켜야 하는데, 누정 문화에서 가장 출현 빈도가 높은 미학적 행위는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서 가치 있게 노는 게 풍류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풍류정원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누정 원림, 풍류 정원, 여전히 난감하다. 그러니 다시 전통조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Read More

마음이 노니는 곳-풍류처

Posted by on 6월 25, 2019 in 조경문화콘텐츠::나무와함께:: | 0 comments

풍류, 잘 노는 것이다. 놀되 형이상학적 쓰임새를 지닌 것이다. 풍류,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노닐 수 있는 마음을 열어 두는 것이다. 경치가 좋은 곳, 풍광이 아스라한 곳, 그 지나간 세월이 아름다운 곳, 속박 없는 무한의 세계이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좋은 친구와 뭐를 못하겠는가. 이게 풍류다. 할 수 없는 게 없는 경지에 도달한 풍광에 놓이는 것이 풍류의 실체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본질을 꺼내도 흔쾌해지는 그 순간이 풍류이다. 울고 싶은 감동에 꺼이꺼이 울어도 된다. 웃고 싶을 때 웃고, 파안대소할 일에 큰 소리로 너스레를 떨어도 된다. 사소한 일에 흥분하고, 친구의 속내에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은 쳐다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런 게 아닌 것을 요구하지마.”가 아니라, 내 안 깊은 곳의 잠재된 의식까지도 끄집어 내 탈탈 털어낼 수 있는 자리가 풍류의 자리이다. 풍류는 함께 하는 것이다. 서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이다. 물론 혼자의 풍류도 운치는 있다. 그러나 열린 공간에서 열린 마음을 나누는 풍류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함께 같은 곳을 쳐다보는 친구인 것이다. 친구가 있다면 풍류도 있다. 풍류는 친구에게서 발현된다. 좋은 친구와 함께 경치 좋은 곳에서 노닌다면 그것은 풍류이다. 오늘 하루 나이를 떠나 속깊은 친구를 찾기 위해 헌신하여야 한다. 오늘만 더 끄적대면 일 하나 마친다. 그러면 내일은 마감하고, 마감의 느낌을 만끽한다. 그러면 풍류의 첫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이천십구년 유월 스무닷새날, 月白이 ‘달집’에서 쓰다.

Read More

나무가 만들어내는 신생의 길을 수소문한다

Posted by on 1월 20, 2019 in 조경문화콘텐츠::나무와함께:: | 0 comments

조경수목을 문화콘텐츠로 바라보는 시각

모든 이의 삶이 융합이고 그가 살아가는 자체가 인문학인 것이다. 나라는 주체와 바깥 대상이 만들어내는 틈새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조경수목을 문화콘텐츠로 바라보는 시각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사람과 뗄래야 뗄 수 없이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게 나무이고, 숲이다. 인류의 문명이 숲의 처소를 빌려 빌딩을 세웠듯이, 조경가는 끊임없이 숲을 경외하며 사람과 나무의 관계에서 새로운 환경의 단초를 읽어내야 한다. 옛 사람의 생각과 그 시대적 상상력의 복원이야말로 문화콘텐츠 창작의 원천이다. 조경수목에 문화콘텐츠의 동력을 입히는 일은 조경가의 또 다른 사회적 역할이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출발할 때, 세상은 살아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환경에서 나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친밀한 게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 주고 받은 과정에서 만들어낸 생활 양식 자체가 문화이다. 나무와 사람이 소통하여 만든 기술, 예술, 관습, 양식 등 참으로 넓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사람의 생활 활동에 목적 의미소를 지닌 행위가 있고, 행위의 산물로 이어지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게 문화라면, 문화의 중심에 식물성 사유가 놓인다. 식물성 사유는 곧 생태적 지혜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생의生意’를 인지하는 것이다. ‘생의’는 천지자연에 널려 있고,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다. 해서 ‘살아있음’으로 이치를 깨우치게 한다. ‘도道’에 다름아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도’를 이루는 과정은 그래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는 내가 바라보는 시선의 측은지심과 생명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된다. 우주만물의 ‘살아있음’에 다다를 때, 나무는 새로운 의미와 상상력과 문화콘텐츠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된다. 그래서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책에 수록된 조경수목들은 학교에서 파종하여 기르고 옮겨 심고 가꾸어 보았던 나무들에 대한 콘텐츠이다. 직접 내 몸과 부딪혀서 내 안 깊숙한 곳에 꿈틀대는 나무들이다. 하나같이 주마등처럼 내 기억의 세포들을 불러일으키는 나무들이다. 가능하면 나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직관적인 감성을 근거하여 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나무에게 다가가는 올바른 길이다. 그런 다음에 나무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탐구하면 될 것이다.

하심의 세계는 나무의 세계이다.

사람에게 나무는 동반자이고 나무와 사람이 만들어 내는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 영역을 둘러보고 산책하는 일이 나무의 인문학일 것이다. 인문학이 내 실생활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문화이고, 문화는 끊임없이 재탄생되어 전해지는 특성을 가졌다. 그 과정에 내가 존재한다. 공허한 울림이 아닌, 몸으로 전해지는 감성과 직관의 자양분은 노동이며 땀이다. 나무를 심고, 캐고, 현장 설계하며 다급한 외침이 존재하는 긴급한 상황 속에서 나무의 콘텐츠를 생산하였다. 그 세월에는 미처 몸을 풀지 않고 해동된 땅에서 시범 보이는 삽질의 봄도 함께 한다. 내 손목의 앨보와 허리는 그때 이미 고장 날 것을 예고한 것이다. 땀 흘린 오후에는 막걸리가 있어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나무와 함께 생활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 층지지 않고 참하게 보인다. 나무는 그 어렵다는 경지인, 하심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세계는 나무의 세계다. 아무 때나 만날 수 있고 툭툭 속마음을 털어낼 수 있다. 나무를 쳐다만 보아도 내가 귀해지는 일이건만 서로 나눌 콘텐츠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신생은 수소문, 매일 아침 예비되어 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만들어 내는 신생의 길은 수소문으로 가능하다. 눈 뜨고 일어나면 이미 신생의 길이 놓여 있다. 그러니 찾아 나설 일이다. 새로울 것 없는 나무에게 신생을 수소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살아가는 일이 신생이어야 한다. 이 책은 조경수목으로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로 구성되었다. 다섯 개의 꼭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꼭지는 낙엽활엽관목에 해당하는 조경수목이다. 고개를 숙이고 찬찬히 살펴보면 말을 건네 온다. 두 번째 꼭지는 계절을 연결하는 눈높이에서 만날 수 있는 낙엽활엽교목으로 구성하였다. 세 번째 꼭지는 시원한 바람과 흔쾌한 몸짓을 구현하는 낙엽활엽교목을 배치하였다. 네 번째 꼭지는 강건하게 보살피는 의리의 나무들로서 상록수를 다루었고, 다섯 번째 꼭지는 특별히 근사한 미인으로 비유한 만경목과 지피초화류로 구성하였다. 각각의 콘텐츠에는 나무와 얽힌 내 자신과의 교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문화콘텐츠로서의 운문과 산문이 적절히 녹아 있다. 곳곳에 나무의 에스프리를 운문으로 작성하였는데, 이는 낭독을 하여도 울림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만의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작성해보는 것을 권한다.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는 생산에 기반을 둔다.

조경 교육 현장에서 조경 수목에 대한 수업을 진행할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조경수목학을 어떻게 활기 있는 수업 장면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나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배우는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여 뿌듯함을 지니게 하는 방도는 없는 것인가? 그렇게 시작한 것이 문화콘텐츠적 접근 방법이다. 스토리텔링을 접목시켜 내 가까이에 조경 수목이 존재하는 것을 어느 순간 퍼뜩 깨닫게 하는 차별화된 교수 방법이다. 주변에 있는 조경 수목에서 깨달음을 찾아내는 방법이란 대상이 되는 한 나무를 나와의 관계를 선정하여 이끌리는 나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검색하고 사색하며 탐색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해하는 방법을 말한다.

“다들 ‘돼지’라고 하면 살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돼지 다리가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돼지에 개 정도의 다리만 달아줘도 비대해 보이지 않는다. 다리가 짧으니까 몸집이 뚱보로 보인다. 시점을 바꿔 보면 대상이 달라진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알려면 검색하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려면 사색하고, 미래를 알려면 탐색하라. 검색은 컴퓨터 기술로, 사색은 명상으로, 탐색은 모험심으로 한다. 이 삼색을 통합할 때 젊음의 삶은 변한다.

”[출처: 중앙일보] 이어령 “암 통보받아···죽음 생각할 때 삶이 농밀해진다(백성호의 현문우답)“

조경수목학은 한 학기 공부하여 마치는 텍스트가 아니다. 오래도록 묵히면서 접근하여야 하는 하드웨어적 속성을 지닌 교과 과정이다. 그러면서 조경 관련 학문의 가장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전체를 이끄는 아우라를 지닌 교과이다. 생명을 지닌 대상이며, 성장하며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개체의 온갖 순간을 우주에 발현하는 게 조경 수목이다. 곳곳에서 만나며 누구에게나 쉽게 내어 주지만, 아무나 온전히 그를 가질 수 없는 이치이다. 볼 줄 아는 자는 오감으로 예민하게 가까이 할 것이지만, 스치듯 무심하여 온갖 순간을 뭉뚱그려 하나의 이미지로만 인지하는 자에게는 그야말로 먼 나라 뭉게구름 하나 떠다니는 한 번 흘낏 보는 행위일 것이다. 누가 더 세상을 윤택하게 가꿀 수 있겠는가. 조경수목학 공부 방법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를 창작하는 데 있다. 일단 글쓰기를 통하여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입혀 나간다면, 어느 순간 조경 수목에 대한 공부가 재미있고 다양한 수목학 용어들이 친근해진다. 조경 수목을 검색과 사색, 탐색의 삼색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이제는 직접 대상과 관계 맺기에 돌입하여야 한다. 주의깊게 파악하는 관찰, 음미하고 생각을 펼치는 고찰, 담박에 전체 구조와 흐름을 파악하는 통찰, 이 세 개의 삼찰이 관계 맺기 방법이다. 여기에 더하여 나의 내면을 대상으로 진전된 살핌인 성찰이 필요하다. 삼색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정립하고 삼찰로 관계 맺으며, 성찰을 통해 문화콘텐츠로 창작하는 조경수목학 공부 방식을 권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경 수목 공부의 시작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 생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훌륭하다.

조경문화콘텐츠창작소『나무와 함께』

Read More

바짝 말라가는 낙엽

Posted by on 11월 19, 2018 in 조경문화콘텐츠::나무와함께:: | 0 comments

형체마저 변하고 있어

울긋불긋 황토에 옷 입히더니, 젖었다 마르기에 으스러지고 있는 중이다. 탄력을 잃고 밟는 동안 낙엽은 귀 떨어져 나간다. 질긴 엽맥이 있어 여전히 미끄럽다. 계단길을 두고 경사지는 한겨울 굴러 자빠질 층을 가꾼다. 평지와 달리 오르내리는 완급이 매력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산길은 오솔길이다. 점퍼를 열고 운동량을 확인한다. 낙화암, 고란사는 단체로 왁자하다. 부소산 굽이굽이 길 따라 저린 통증은 되살아난다.

백운동 원림이 다가오길래, 이쪽이려니 했다. 그러다 와룡매 인연이 다가선다. 급한 물살을 타고 주제를 와룡매 쪽으로 돌린다. 문화유산이고, 후인에게 전해줘야 할 콘텐츠이다. 역사적 사실과, 묻히고 말 뻔했던 기록을 문화콘텐츠로 작업하는 방향 하나를 설정한다. 산책은 생각을 좀 더 다듬고 알맹이로 빛내주는 데 좋은 역할을 해낸다. 시키지도 않았건만 기어코 몰고 간다. 둘 다 문화콘텐츠로 규정한다. 식재와 공간이다. 식재도 공간도 살아 움직이는 실체이다. 실체를 대상으로 해야 실존의 가치를 공유한다. 뭣 때문에 화두를 다루고 있는지, 궁극의 지점은 무엇인지를 자꾸 되새긴다. 어디를 향하고 있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물어본다.

Read More

동아시아라는 말에서

Posted by on 9월 28, 2018 in 조경문화콘텐츠::나무와함께:: | 0 comments

일반적으로 중국이 동아시아를 대신하는 것으로 파악

서재를 꾸며 놓고는 서재가 서재라고 와 닿기에 한참 걸린 셈이다. 동아시아라는 잘 쓰지 않았던 단어가 가득 찬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한중일 삼국의 조경 비교에서 읽고 발표하다 보니, 이를 보완할 많은 논문과 책이 연이어진다. 동아시아, 어쩌면 그냥 중국이라는 말로 축약된다. 중국이 곧 동아시아라고 할 정도이다. 고전의 정신 영역에 들면 결국 절실하게 고민하고 언어를 다듬으며 의미를 부여한 시도를 중국에서 찾게 된다. 말이 한중일 삼국의 비교이지, 결국 시원을 찾아 들어가면 중국을, 중국의 연구와 책을 먼저 만나 이해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알고 다듬을 정도가 되어야 한국도, 일본도 보일 것이다. 한국을 안다는 것이 그만큼 소소하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의 출전을 찾다 보면 다시 중국이다. 내친김에 논문의 참고 문헌과 발표 글들에서 많이 인용하는 서적들에 방점을 찍는다.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동아시아예술미학총서 시리즈

절판된 책이 많이 나온다.

절판된 책이 많다. 사실 그동안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을 구해 읽었지만 이제는 방향을 정하여 시도하는 책읽기이기에 오히려 지금 구입할 책이 더 많아졌다. 관심과 이끌림에 의한 독서는 여러 방만한 관심과 추구였을 것이다. 책 사는 마음에 주저함이 크다. 책값도 보통 아니지만, 연금 생활자로서 사고 싶다고 마냥 끌려갈 수만도 없기 때문이다. 어려서 소원 중 하나가 ‘사 보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동안 필요하고 감당할 수 있는 독서 생활을 한 셈이다. 이랬던 것이 수그러든다. 자꾸 몇 번 더 생각한다. 그러나 감당의 정도와 상관 없이 꼭 필요하다는 스스로의 권장에 꺾인다. 단행본에 대한 이러한 시도에 절판 도서로 대응하고, 곧바로 헌책 사이트에서 검색하여 그렇게 새책 같은 헌책과 만나기도 한다. 기쁘고 설레는 순간이다. 한 달여 동안 그렇게 책이 택배로 들락댄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키워드, 민족자존 문화창달

중국 고전 미학의 정수와 만나다.

처음 중국 조경의 핵심인 ‘원야’를 다시 찾아 읽으면서 관련된 중국 고전 미학의 세계로 들게 된다. 팔경에서 구곡문화, 다시 중국 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의경과 만난다. 팔경이나 구곡을 공부하려니 중국사의 문화와 철학, 미학을 다시 체계화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게 뭔가 싶어, 이를 대신할 우리 것은 없을까 생각하다 ‘풍류’와 맞닥뜨린다. 그렇다. 풍류로 방향을 바꾸어야겠다고 풍류 연구자와 통화까지 하였다. 그러나 자꾸 변화, 발전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노릇, 어느 순간 ‘의경’이라는 중국 고전 미학의 정수에 매료된다. 의경에 관한 단행본을 찾다 보니,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이라는 책을 만난다. 동아시아 예술미학 총서 시리즈 모두가 반갑다. ‘중국 미학사’, ‘중국 현대 미학사’,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 ‘소요유, 장자의 미학’, ‘대역지미, 주역의 미학’, ‘동아시아 미의 문화사’ 이렇게 6권이 출간되었다. 물론 각각의 저자는 중국 학자이고, 이를 번역서로 출간 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책을 펼치든 중국 고전 예술 미학의 정수로 가득하다. 중국 학자들을 좀 더 세밀하게 만나고 있다. 아직 1권의 책을 구하지 못하였다. 주역의 미학이 그것이다. 신청하였으나, 절판된 채 아무 소식도 없다. 조만간 연락을나누어야겠다.

여언재 차실

중국의 전통 조경 문화에서 만나는 중국식 학자의 자세

이 책은 고려대학교 심우경 교수님이 국내에서 책임 번역한 책이다. 장가익(장지아지) 교수의 방대한 전거와 비상한 학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과연 바다는 깊고 산과 계곡과 들판은 방대하다. 세밀하게 파헤치다 보면 어느새 그 속에서 산책하고 있는 모습도 있을 것이라 느긋하게 접근한다. 책은 오래전에 입수하였으나 이제야 통독한다. 전통원림의 문화 뿐 아니라, 중국문학이론비평사도 시대별로 입수하였다. 문학이나 미학, 철학의 전 영역을 걸쳐 원림예술에 투영된 핵심을 변화와 함께 살피러 함이다. 중국회화이론사도 그런 의미에서 구비하였다. 그동안 서재에 깔렸던 미학과 그림과 중국 관련 책들도 일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만나는 책들에게 거는 믿음은 남다르다. 어느새 관련 논문을 모으고 출력하여 정리하면서 단행본과 서로의 중함을 다툰다. 의경에서 동아시아 담장으로 주제가 변곡되기까지 짧지만 방황처럼 순환한다. 그래도 하나같이 독립적이지 않다. 깊이 있게 여러 번 읽으면 밑줄이 또 달라질 것이다. 처음 긋는 밑줄만이 모두는 아니다. 새롭게 또 읽을 때의 새로운 밑줄을 기대한다. 동아시아는 그렇게 중국에서 시작되고 중국에서 읽힌다. 어디까지 다가가야 그야말로 한중일이 구분되고 비교될까. 모든 것에 우선해서 책읽기에 시간을 아껴써야 할 것이다. 그래도 누가 곡주 한 잔 하자고 하면 툴툴 털고 일어나 흐린 주점에 있을 것이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