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달차회

교사 차 동호회, 차, 차도구, 차인, 차담, 차역사

안개로 둥둥 떠 있는 아침

Posted by on 11월 26, 2018 in 與言齋::묵상, 선달차회 | 0 comments

상 차려 먹는 사진 찍지 않는다. 대단하고 장해서 찍고 품평하더니 시들해졌나? 일상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대신 웬만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던 습관을 바꾸려고 애쓴다. 누워서 소주천을 돌리다 보면 다시 잠에 들고, 1시간은 지난다. 그렇게 어떤 날은 2~3번 연장하기도 한다. 오후에 졸음이 오는 것을 예방하고자 함이다. 하루를 둘 또는 셋으로 쪼개서 잠깐씩 눈 붙이고 또 하루를 맞이하고 하는 수순에 절로 도달하지 못한 탓이다. 

기상하면 손 씻고 바로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내 담는다. 먹을만치 담아야 하는데, 종류별로 조금씩 접시에 모두 담느라고 문이 열린 상태로 냉장고가 고생이다. 의자에 앉아 반찬을 담다 보면 추운 기운으로 무릎이 시리다. 의자, 이거 기막히다. 구부려 반찬 빼고 넣고가 허리에 무리더라. 접이 의자 놓고 앉아서 꺼내고 넣고 담고 하는 게 편리함을 넘어 그 이상이다. 찌개를 끓이지 않으니 이 또한 기막힌 수이다. 남아서 다시 끓이는 순환을 아예 차단한다. 깔끔하고 오래 저작하면서 섭생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국 없는 식단’이 남다름으로 다가선다.

혼자 사는 방법이 익숙해지면 이런 글도 줄겠지. 밥상 차려 놓고 찍는 사진이 없어지듯이. 3개월. 궁금해하지 않기가 시작되는 딱 좋은 시간인지, 인사말이 확 준다. 세상은 약속하여 지키며 사는 게 아니라, 약속된 어떤 경로를 각자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경로를 살든 얼추 익숙한 세월의 운행법을 벗어나기 어렵다. 상황이 불변하여 고정되는 게 없고, 마구 원하는 대로 훨훨 날아다닐 수도 없다. 때 되면 안다고 했고, 때가 약이라고 했다. 힘든 사람에게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 시선이 머물고,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 좋은 오늘’이 선물로 예약되어 있다.

운행은 항로를 가진다. 오래된 우전 부스러기 발효차를 먹을 기회가 없어 버릴 직전에 뜨거운 물로 우려내는 유리 주전자를 활용하게 된다. 새벽에 마실 물로 적당하다. 상 차려 밥 먹는 사이 조금 데워서 숭늉처럼 밥그릇을 덥히며 마실 물 대용으로 몇 잔 연거푸 마신다. 일상의 살림살이 방법이 익숙해지는 게 많아진 반면에 깨달음 비슷한 호들갑은 반비례한다. 누구나 사는 일상을 마치 큰 성취처럼 떠벌릴 수 없기도 하거니와, 혼자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보는 데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특별히 놀아도 혼자 노는 동안 생각이 뭉친다. 혼자 사는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의 임계치는, 뭉친 생각이 이끄는 항로를 즐길 줄 아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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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 육보차의 짙은 안갯속

Posted by on 11월 17, 2018 in 선달차회 | 0 comments

차를 마시니 안갯속을 걷는 듯 잦아든다

가끔 끄집어낸다.

이제 두어 번 정도 우릴 양 남았다. 깊은 잠을 이룬 날이라서 더욱 차맛이 그윽하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의 진원지는 같은 층이 아니었다. 같은 층에서 서로 왜? 매일 저렇게 돌릴까. 하면서 서로 의혹을 가졌었다. 문자를 보냈다. 이런 소리가 매일 들리는데, 거기는 안 들리냐고 물었다. 전화가 왔다. 나는 그쪽에서 매일 그렇게 세탁기를 돌리는지 알았단다. 서로가 의아해한 것이다. 일단 의혹은 풀었으나, 그럼 아래층은 왜 그렇게 매일 세탁기를 돌리는가에 대하여는 남았다. 

아아, 드디어 옆집에서

잠 좀 자자고 아래층에 한마디 고언을 했는지, 조용해졌다. 얼마 만에 깊게 잠을 이루었는지 모른다. 아예 소리가 나지 않는 것, 나도 작게 나는 것, 내 생각에서 의혹이 지워지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어느 유형일 것이다. 실제로 조용하다. 저녁에 시작하여 잠자리 들 시간 내내 이어지고, 새벽 두 시쯤 잠깐 그쳤다가, 다시 아침이면 돌아가는 게 일상적이지 않다는 생각과 동시에 잠 못 이루며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어제까지 견디기 힘든 정도였다.

공간에서의 낯섬과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까지도 견딜 수 있다. 그게 일상이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어떤 이해와 해석의 문제에서는 쉽게 물러나지 못한다. 그러니 안다는 것이 얼마나 앙상궂은가. 마치 지식만이 가장 잘 짜여 있는 정교함과 날씬함이 있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얇고 가벼워 언제라도 어설프고 날아가기 가장 쉬운 것이다. 방금 전까지 세탁기 소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탓하였더니, 이제 달라진 게 뭐 그리 있다고 이리 쉽게 수긍하는가. 그러니까 이해가 되었다는 게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이럴 때 익숙한 차를 우려낸다.

기억의 향유이다. 외적인 압박에서 잠시 내적인 사유로 되돌린다. 걷는 일과 문화콘텐츠를 구축하는 밑그림 만드는 일로 자리한다. 내 분야, 내가 살아온 영역의 모든 것을 문화콘텐츠로 되살린다. 전체적인 윤곽은 마련되었다. 총론에서 각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입장에서 주어진 일상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가을 마치고, 겨울이 오면, 긴 겨울 동안 오로지 한 가지 일로 내년 4월까지 완주한다. 그 안에 또 다른 무엇을 개입하거나 늘릴 수 없다. 그리하여 내년 4월 이후에야 실질적인 문화콘텐츠 구축 계획과 실천의 손맛을 익힐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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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성 육보차 끄집어 내니

Posted by on 10월 23, 2018 in 선달차회 | 0 comments

진하고 묵직하다. 여언재에서 수원 집으로 움직이는 날, 곡기를 위해 식품 창고를 뒤지니 간고등어와 막내딸이 보낸 반가공 요리가 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니 그냥 그렇게 표현한다. 늘 그렇듯이 곡기를 채우고 난 이후의 포만감은 미리 예측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식사 후 저절로 광서 육보차에 손이 간다. 오래 우려나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좀 빠른 손놀림으로 몇 잔 연거푸 마시니 그 진함과 묵직한 목넘김이 아침 곡기를 다스리기 시작한다. 조금 맞지 않는지 울컥 서로 비벼대지만, 이내 평온해지리라는 것을 안다. 허나 육보차도 식으면 식은 맛으로 뜨거운 육보차와 꽤 다른 모습으로 서로운 존재를 각인시킨다. 해서 가능한 뜨거울 때 마시려고 자리를 지킨다. 

광서성 육보차의 진한 맛과 향, 그리고 묵직한 목넘김은 뜨거울 때 제맛이다.

창문 열어 두니, 찬바람이 방으로 스멀거린다. 닫자니 아직 그쪽 뒷설거지가 남은 상태이니 몸을 추스려야 할 참이다. 차를 마시면서 생각을 모은다. 어제 국제 문화 유산 관리자 프로젝트 프레젠테이션에 참가하느라 롯데리조트 이후의 시간은 내내 mendeley에 빠져 있었다. Jotero와 겸용으로 사용할까 한다. 우선 멘델레이를 두루 섭렵하려니, 누웠다가도 다시 생각이 도져 테스트하느라 컴퓨터는 날을 샜겠다.  아침에 열어보니 여전히 그 선에서 머물고, 나는 또 생각이 변화되어 세팅을 또 다르게 한다. 아직까지 그 자리에서 정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시행착오를 통하여 사용자로서의 자격을 갖춰간다. 그렇게 믿을 게 못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래도 기대본다. 분명히 요긴하게 사용할 일이 있을 것이다. 미리 대비해본다. 광서성 육보차도 점차 색감이 엷어지고 있다. 나도 여언재에서 일어나기 위해 일의 기운을 떨쳐 내야 할 참이다. 준비하자. 여언재에서의 외출을 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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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의 반발

Posted by on 10월 9, 2018 in 與言齋::묵상, 선달차회 | 0 comments

가끔 새로운 놀이를 즐긴다.

즐거움은 여행의 속성을 닮아있다. 살면서 수시로 새로운 의지를 개괄하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여행이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닿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의지로 만드는 새로움은 각성이다. 매일 먹는 끼니조차 똑같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완전한 주체는 아니지만 끼니의 전후를 스스로 결정한다. 차생활에서 받은 습속이기도 하다. 똑같은 차를 여러 날 줄기차게 연작하면 몸에서 차를 물로 여긴다. 차의 남다른 개성을 몸의 적응 기제가 가소롭게 만든다. 이뇨까지 돕지 않을 정도이다. 그래서 바꿔 준다. 적당히 그때그때 불규칙에 근거하여 순환시키면 미처 속성 파악이 더딘 몸이 속는다. 차의 온전한 기운은 사람의 선호도에서 저만치 멀리 벗어난 낯선 손님이다. 이 차, 저 차, 여차 저차 할 때, 그럴 때 차는 온전한 기운을 낸다.

새롭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을 때 고양된다

내가 주인인 생활을 열었다. 사진 정리를 하다 보니 작년 12월, 올해 1월의 모습은 설레는 신입생처럼 청명하고 명징한 기세를 지녔더라. 오호라, 무려 5개월 후의 몸가짐과 자유 정년 실천의 생각이 예비되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안되었다. 그 선한 인상이 지구를 수놓고 있었더란 놀라움에 전율한다. 그러니 33년 동안 경험하지 못한 무수한 것들이 한꺼번에 꽈리 튼 채 호시탐탐, 시험에 들게 하는 건 대적할 수 없다. 일상에서 직장 생활과 가정이 분화되어 나누어 살았으니 일의 성격에 네 일이 있고, 남의 일이 있었다는 실화이다. 분화에서 통합되어 가고 있는 일상의 생활 속성들이 모두 새롭다. 새로워서 낯설고, 익숙하지 않아 각성 수준 또한 높다.

피하거나 멀리 두지 않는다

어떤 경우라도 마주하여 근성을 뽑는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받아들인다. 매어 있듯이 그 일에 머문다. 생각도 실천도 함께 운행된다. 안개처럼 뜬구름처럼 일고 지는 마음까지 오래 호응한다. 그리하여 억지로 끼니에 매이지 않는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호들갑도 재운다. 한껏 게으른 어떤 날은 마음이 육신의 허접함을 재울 것이다. 그러면 받아들이면 될 일, 현토를 달지 않으면 그만이다. 여기까지 오니 得道한 듯 의젓해 보인다. 어쩌라, 반대의 경우가 더 많으니 헛 것이다.  육신이 마음의 허전함을 이끌고 시녁을 고단하게 하는 일이 더 많이 생기는 것을 알기나 할지. 根性은 몰입이고 오래 물고 늘어지며 끌고 가는 세력이다. 그러니 어색하고 남다른 신경 쓰임과 경험 못한 서툼 따위는 당연하다고 위무한다. 살아온 방식이 처음부터 정해지지 않았듯이, 경험이란 고르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지 편파적 또는 유목과 가닥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1차적 생산물을 가공하여 곤궁함을 달래는 정도이나, 이 또한 처음부터 정해 놓은 것은 아니다.

올 것은 어느새 다가와 있고, 떠날 것은 채비 하느라 덜컹댄다

뜨거운 여름 슬쩍 소식 끊고, 선선한 바람으로 옷깃을 여밀 때, 잊힌 외투 뇌새김 하듯 쏟아지는, 올 것은 어느새 다가와 있다. 부소산성 산책 나갔다가 되돌아온 것이 그랬다. 떠난 것을 못내 아쉬워하거나, 아직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채비도 없이 소리도 없이 떠났기에 나 혼자 분주했다.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건드려 찬기운으로 파고드는 그날 아침, 기어코 산행을 했다면 으스스한 가을 문턱에서 겨울을 맞이할 수 있었겠다. 방바닥을 덥히고 창문을 점고하면서 뜨겁게 차를 우려 몸을 다스리는 사이, 기어코 떠나야 할 여름임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세탁을 맡길 간절기 의복을 끄집어내 살펴 맡길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몫까지 사용되지 않아 물컹한 궁리로 다시 분주하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그랬다. 매일 습관처럼 반복되며 쉽게 진행하던 일상은 차 마시듯 술술 넘어갔다. 거리낌 없이 시간대별로 비롯되듯 나를 만들었고 외형을 형성하였다. 그런 일과를 유지하는 게 자연스러운 생활 태도였다. 지금은 다르다. 익숙한 것들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일상을 맞이한다. 누구나 하고 있고, 별로 세울 명분도 없는 일상의 소소함이 무게로 다가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무책임한 말을 한 수레 실어, 소중한 익숙함이 손님처럼 다가온 새로움을 맞이하는 것으로 치환한다. 피하지 않는다. 네 일이었고, 내 일이었던 분별의 세월에서 걸어 나왔다. 전부 다 내 일인 일상을 만나느라 자유 정년을 선물로 사용했나 보다. 내일 아침과 만나기 위해 냉동고에서 꺼낸 한 끼니의 간고등어와 연잎밥이 창가의 실온에서 별빛을 쏘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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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황차를 마주한다

Posted by on 10월 8, 2018 in 선달차회 | 0 comments

몸 하나 간수하는 데 참 많은 공력이 든다

일찍 잠을 청하니 2시, 3시면 일어난다. 서재가 익숙하지 않고 하는 일상이 낯설어 순서 뒤죽박죽이지만 하나씩 정리될 것이다. 논문을 읽으려고 태블릿용으로 요가북을 구했다. 벌써 신형이 나온 물건인데 가격은 그대로다. 안드로이드용은 더더구나 없다. 이게 마지막 버전일 수도 있겠다. 사용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그 사이 미끄러워 떨어뜨리기도 했고, 필름을 붙이려 반포 전문 업체에 전화하여 물건을 준비시키고 부착하기도 했다. 참으로 공력을 들여 붙이는 것을 보고는 과연 믿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그 사이 퀼트로 파우치가 만들어지고, 요가북 인조가죽 케이스까지 갖췄다. 약간의 오차가 있으나 두꺼워진 채 파우치에 어찌어찌 넣을 수 있으니, 사용하다 보면 저희들끼리 양보할 것이다. 산책 시간을 기다려 부지런히 부소산성을 향하고 운무에 싸인 성 풍경을 감상하고 산책을 시작하였으나, 으스스 추운 온몸으로 파고드는 한기에 기세가 수그러들고 만다. 되돌아왔다. ‘되돌아오기를 참 잘했다’를 연발했다.

운무 가득하여 먼곳의 안부가 마치 코앞의 안부처럼 선명해진다. (부소산성 운무)

일의 순서를 정하지 않으면 순환고리에 갇히더라

한결같이 그랬다. 일이 순서에 들지 않아 엉망이 된다. 마음의 향방이 중요하다. 마음이 정해졌다한들, 순서를 궁리하지 않으면 이 또한 제멋대로가 되고 만다. 애터미 간고등어를 굽는다고 시도하였지만 그 순간 동시에 다른 일이 착수되어 있어서 뛰다시피 동동댄다. 하나씩 차분하게 살림살이를 한다는 게, 내게는 쉽지 않다. 냉동실에서 간고등어를 꺼내 놓고는 산책을 다녀올 동안 냉동실 문을 열어 둔 일도 묵과할 수 없는 방심의 증좌이다. 이게 보통 궁리가 아니다. 그러니 이 일을 일상에서 오랫동안 한 사람에게는 저절로 되는 일이겠지만, 내게는 모든 게 진땀을 뺀다. 들쑥날쑥 일머리가 서질 않는다.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익숙해지고 하나씩 늘렸으면 좋으련만 공부할 일도 산더미처럼 널려 있으니, 먹고 입고 자는 일의 일과에서 하나라도 벗어나면 좋겠다. 일과에서 줄어든 만큼 분주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는 생길 것이다.

광교산 호수길에서 흰뺨검둥오리 3마리와 한참을 수근댔다.

세상에 쓸 궁리는 곳곳이며, 매 순간이더라

먹다 남는 것들은 모두 골치 아프다. 분리수거 조차도 힘겹다. 그러나 점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접근하며 다가서고 있다. 껍질 두꺼운 방울토마토를 버리려다 구웠다. 장아찌 몇 개 넣어 함께 구워 찬으로 치웠다. 이 생산적인 엄청난 일을 나는 자꾸 치운다고 한다. 치우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 그야말로 ‘살림’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인데 불구하고 자꾸 치운다고 한다. 짠 음식은 짜지 않게 하는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한 가지 음식에서 서로의 조화를 위하여 섞어서 산출하는 어떤 일이 요리 아닐까 싶다. 물론 내 요리라는 것은 집에서 가져온 밑받찬을 가지고 조리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세탁기 소리가 비행기 소리처럼 커져 있다. 탈수에서 탱크 밀어붙이는 소리를 낸다. 세탁기 사용도 이제 겨우 몇 번 경험한 것이다. 왜 이리 할 게, 해 봐야 하는 일이 많을까. 세탁에 맡길 셔츠도 수거 요청한 상태이다.

‘부소산의 다람쥐도 배가 고프다’, 나도 때마다 걱정이다.

익숙한 게 차 우려 마시는 일이니, 이또한 처음에는 그러했으니라

어쨌거나 세팅하여 돌아가게끔 하는 오늘 아침은 벌써 공력을 거의 다 사용한 듯하다. 저절로 차를 마시려고 앉는다. 오랜만에 황차를 우린다. 익숙한 차 우리는 동안, 익숙한 일은 거들떠보지 않고 여기저기 다른 일 몇 개씩을 우린다. 그래서 전모가 밝혀지고 생각이 받쳐주는 일도 발견된다. 모든 게 내 안목과 생각의 목록에 거미줄을 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빠져나가는 것은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끄집어내서 다시 집어넣는 방식이다. 망이 끊어져서 머리 속에서 지워지면 다시 끄집어내서 챙기고 자리 잡는다. 원리는 간단하나 실행을 주저하는 게 일상이었나 보다. 갖춰 놓고 산다는 것은 물목의 현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여 예측하고 있다는 말을 대신하는 요건일 것이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찻물 끓는 소리를 구별하는 일은 익숙하여 별 일 아니다. 매사 ‘살림살이’가 이렇듯 찻물 우리는 일처럼 저절로 눈 감고도 자신 있게 운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게 쉬울까. 세월의 때가 곱게 들어야 될 일이다.

황차 우리는 일처럼 익숙해질 수 있는 ‘살림살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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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다는 것

Posted by on 3월 28, 2017 in 선달차회 | 0 comments

차 한 잔 축인다. 여전히 돌고 돌아도 황차로 오면 더 반갑다. 내 6번째 시집 ‘천년의 숲에 서 있었네’에 <공진화-구기자나무>란 시가 그랬다. 구기자나무 잎을 훑어내면서 가시와 신경을 날카롭게 다뤘는데, 이때 가시의 방향과 결을 느꼈고, 공진화라는 인류의 위대한 깨달음에 전율하였다. 개념을 아는 것과 일을 통해서 그 개념의 겨드랑이까지 날 것으로 만난다는 게 그래서 지극한 행복이다. 황차 역시 내게는 길들여짐의 또 다른 개체이다.
<길들여진다는 건 얼마나 긴 세월일까 바람부는 방향으로 늘어져 흔들리다 땅 냄새 맡으면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길들여지는 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잔뜩 푸른 엽록소의 즙액이 유전자 지문 사이를 메운다 온몸이 바람 부는대로 휘청거린다.
온형근 시집, 천년의 숲에 서 있었네, ‘공진화-구기자나무’의 일부>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집어냈다. 어느날 구기자나무 잎을 덖어서 차를 만들어 보려했던 어느 단편이다. 차 맛은 추천하고 싶지 않았고, 가시와의 신경 날카롭던 순간의 몰입에 대하여는 기억 새롭다. 모든 기호도 길들여짐이다. 그러니 길들여짐에 반발하는 내적 성숙의 목소리 또한 시들지 않는다. 땅 냄새에 멈추고 바람 부는대로 휘청이며 살지만 잊지 않고 의심하고 끝까지 되묻는다. 그러니 공진화의 세월은 까마득하다. 길들여지는 것 또한 그러하다. 스스로도 모르게 그리 되어진다. 인식이나 파악 또는 분석류와는 다르다. 어느 순간 길들여져 있는 자신을 만난다. 여전히 까칠하면서도 길들여져 있는 모순의 현재를 살고 있다. 황차를 마시면서 이 길들여짐은 뭘까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빈한함에 깃드는 도를 즐기는 것일까. 옛 선비 정신을 숭상하고 있음일까. 허기를 채우고 간략한 차를 음용하며 삐끗한 허리도 이제는 걱정하지 않는다. 잔뜩 굳어진 근육도 풀릴 것을 안다. 봄철의 찬 기운과 새 학기의 긴장과 제대로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뭉쳐 있다가 낮은 씽크대에서 늘 찾아오던 왼쪽 허리를 치고 익숙한 몸에 비상을 걸었다. 그래서 다시 허리와 근육과 몸의 길들여짐을 기다린다. 이런 치료, 저런 치료 그냥 한다. 안다.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을. 그나마 아직은 이런 류의 판단을 해도 되는 젊은 호기로움을 치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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