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made in 5월, 2019

조선 후기의 시와 정원

Posted by on 5월 30, 2019 in 與言齋::묵상 | 0 comments

일찍 일어나면 아침 기운 가득한 들판과 강과 산의 농축된 바람결을 만나고 싶어 베란다와 복도의 창문을 활짝 연다. 양쪽에서 터지듯 다가서는 환기류를 따라 내 생각도 부풀었다 차분해진다. 그렇게 활짝 열고 아침을 해결하고, 부모님께 차 공양 올린다. 그런 연후 해 뜨기 전에 창문을 닫고 방열커튼을 치고 안쪽의 창문을 모두 닫는다. 양쪽 모두 닫고 가둘 수 있도록 살포시 장치한다. 어제의 경우 그렇게 했을 때, 종일 열지 않아도 방안이 덥지 않았다. 아직 선풍기도 잠깐 필요한 만큼 돌아가고는 곧 끈다. 오히려 돌아가는 소리가 고요에 비하여 커서 소리에 덥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외출 없는 날은 이렇게 하루를 보낸다. 에너지 소비가 거의 없는 셈이다. 이제 잠깐 묵상을 하고 나서는 수업과 토론을 위하여 하루를 준비한다. 굳이 최종 논문을 유지하려할 필요는 없다. 바꿀 수 있으면 바꾸어야겠다. 조선의 후반기에 굳어진 전통정원을 위하여 그 시기에 나온 한시를 중심으로 시와 정원에 대한 집대성을 논문으로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래도 가슴 뛰는 일에 내 모는 것이 올바르다. 기술자양성센터는 기능자 직무분석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선에서 마쳐야겠다. 좀 더 나를 자극하는 어떤 동기가 부족하거나, 추동력이 될 수 있는 주변 여건이 미흡하다. 이럴 때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신난다. 신나는 일이 가슴뛰는 일임을 알지 않는가. 조선시대 후반기의 시와 정원에 대한 지향점은 무엇일까? 이를 집대성하여 정원의 원형을 제시할 수 있는 기반어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은 또 어떠한가.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의 변화도 꽤나 후반 연구로 흥미로운 분야 일 것이다.

-이천십구년 오월 서른날, 退關이 ‘달집’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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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계를 물린다.

Posted by on 5월 29, 2019 in 與言齋::묵상 | 0 comments

엊그제 정말 오랜만에 필영형이 전화하였다.
바로 받지 못하여 확인하는 순간 전화를 넣었더니, 받지 않는다.
술 한 잔 하시고 예전 습관대로 전화하였다가,
괜히 했네..,
하시면서 하루를 접으셨나보다.
그리고는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경우가 있으니까 이심전심 뭔지를 알겠다는 생각에,
죽니, 사니 좋아하던 사람도 이렇게 멀찌감치 물러나 있다.
종대형은 또 얼마나 좋아했던가.
1년에 몇 번 만나고 있나?
종대형에게 말할게 있다.
“형 이제 나 만나도 담배는 없어.”
군산에서 농사 짓던 날 밤에 달려온 항섭형에게 인사한다.
“그 귀한 푸성귀를 집에 전달하였더니 온 식구가 좋아하면서
즐겼어요.”
그런데 새벽 5시에 나가면서 책은 왜 두고 갔어요?
수원 집에 임무를 부여하였으니, 거기서 찾으셔야 할 듯 해요.
금요 포럼이 사실상 와해되었다.
그래서 ‘낭만 포차’라고 하였더니, 집 딸들이
“에이, 아빠.
금요 포럼이 훨씬 멋있어요.”라고 한다.
그러면 다시 ‘금요 포럼’이다.
정진수 형은 요즘 바쁘신가 보다.
아니면 새로운 삶의 묘미를 체득하신거다.
다들 그립다.
나는 당분간 아호를 바꾸기로 했다.
퇴관이 그것이다.
‘모든 관계를 물린다.’는 뜻이다.
退關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깊은 뜻을 이렇게 슬쩍 올리는 이유는,
진정한 퇴관이 어렵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이 육이오 사변 같은 세상을 영접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천십구년 오월 스무아흐렛날, 退關이 ‘달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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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소리를 내다

Posted by on 5월 28, 2019 in 시집/신작시 | 0 comments

내 모셔야 할 것들 많아지니

무거웠으리라

퇴관은 그 사이에 스며들었고

여태 부조리한 아픔 비슷한 방문 형태가

한꺼번에 퇴관의 요로로 급물살을 이루었다.

슬퍼할 틈도 마련되기 훨씬 이전에

차곡차곡 쌓여 포효하듯 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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