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made in 6월 17th, 2019

덧없음과 더

Posted by on 6월 17, 2019 in 與言齋::묵상 | 0 comments

살아가는 일이 박복하여 서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루하여 무게를 털어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이 남루하다고 후지다고, 그야말로 허접하다고 생각하는 동안 나는 또한 얼마나 남루하고 후지고 허접해지는가. 홍루몽과 구운몽을 보면 참으로 덧없는 게 살아가는 일이다. 돌고 돌아 결국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게 이치이다. 덧없음이다.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해가 뜨니 해가 지는 것이다. 하루가 와서 하루가 가는 것이다. 해가 와 해가 가는 것이다. 삶이 와 삶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께 차를 올리면서 이 덧없음의 행위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에도 ‘더’는 없다. 세상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덧없음’이 있을 뿐이다. 살아 있음에 ‘더’는 아예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홍루몽과 구운몽으로 오늘은 하루를 바쳐야겠다. 대체 ‘덧없음’은 어찌하여 곡진하고 흥미진진하여 아름답기까지 한 것인가를 덧없이 살펴야겠다. 덧없음이 만들어내는 덧없는 행위를 위무하면서 나도 견딜만하다고 말해야겠다. 그러니 덧없음이 만들어내는 원림 또는 정원의 의경은 무엇일까. 아마 그 과정일 것이다. 

그 사이에 있고 없음 

묻고 답함이 스쳐 갔다

온형근 시집,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모감주나무’에서 

만들어진 모든 게 덧없음이어서, 사람은 그 과정을 아프도록 위로하면서 견딜만하다고 스스로 다독거린다. 그래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 속에서도 끼니를 잇고 웃을 일도 생기고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더’의 속성을 가진다. 그래서 인류가 유지된다. 나보다 ‘더’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고, 즐거움과 행복을 ‘더’ 고마워하고, 만들어내고 땀 흘리는 과정을 알기에 아낌없이 ‘더’ 치하하며 높이 쳐준다. 사람들이 원림을 가꾸고 정원을 만드는 게 바로 이 지점의 정신적 가치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덧없음과 더의 경계는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삶의 과정에서 뚜렷해진다. 그러니 사람과의 관계를 더불어하지 않고, 삶의 과정을 도외시하는 ‘덧없음’에서, 사람 속으로 어렵고 서러운 일상 속으로 ‘더’의 경지를 체득함이 그나마 덧없음을 잠시라도 잊게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

-이천십구년 유월 열이렛날, 月白이 ‘달집’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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